예전에 망우리 공동묘지로 불리던 망우역사문화공원에는 유관순, 한용운, 지석영, 조봉암, 장덕수, 방정환, 오세창, 문일평, 김영랑, 박인환, 계용묵, 이중섭, 이인성, 차중락 등 근현대사를 빛낸 인물들의 무덤이 즐비해 살아 있는 역사 교실로 불린다.
이곳에 묻힌 인물 가운데는 일본인도 두 명 있다.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의 산림녹화에 기여한 아사카와 다쿠미와 사이토 오토사쿠다. 사이토 오토사쿠의 무덤을 찾는 이는 드물지만 아사카와 다쿠미 무덤에는 추모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2015년 아사카와 노리타카·다쿠미 형제 현창회도 조직돼 해마다 추모식을 열고 있다.
아사카와 다쿠미는 1891년 야마나시현 호쿠토시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1909년 현립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영림서에 취직해 국유림 관리 업무를 하던 중 서울의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7살 위의 형 노리타카의 편지를 받았다. “우리가 듣던 것과 달리 조선이 살기 좋은 곳이니 함께 지내자”는 권유였다.
형의 말에 따라 다쿠미는 1914년 5월 현해탄을 건너 조선총독부 산하 임업시험소에 취직했다. 그는 조선에서 눈을 감기까지 17년 동안 낙엽송 양묘에 성공하고 잣나무 노천매장발아촉진법을 개발하는 등 우리나라 민둥산을 푸르게 만드는 데 힘썼다. 현재 인공림의 37%가 그의 도움으로 조성됐다고 한다.
다쿠미는 산림 전문가이면서도 인도주의자였고 예술적 안목이 뛰어났다. 그는 조선의 자연과 조선인을 사랑했고 조선의 예술에 심취했다. 그가 친구인 민예운동가 야나기 무네요시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대목이 등장한다.
“처음 조선에 왔을 때 조선에 산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고 조선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몇 번이나 고향에 돌아갈까 생각했습니다. 조선 사람들에게 아직 깊이 친밀감을 느끼지 못했을 무렵 쓸쓸한 마음을 달래주고 조선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게 해준 것은 조선의 예술이었습니다.”
형 노리타카는 조선 공예의 아름다움을 맨 먼저 발견한 일본인으로 꼽힌다. 조선 도자기에 관한 여러 편의 저서와 논문을 쓰고 전국의 도요지 678곳을 찾아내 ‘조선 도자기의 신(神)’이란 별명을 얻었다. 조각과 회화 작가로 입문해 조선미술전 등에서 여러 차례 입상하는가 하면 시도 수백 편 남겼다. 야나기 무네요시를 조선 문화와 예술의 아름다움에 빠져들게 한 것도 노리타카였다.
다쿠미도 저서 ‘조선의 소반’과 ‘조선도자명고(朝鮮陶磁名考)’를 남겼다. 형제는 야나기와 힘을 합쳐 전시품을 수집하고 후원자를 모집해 1924년 4월 9일 경복궁 집경당에 아시아 최초의 공예미술관인 조선민족미술관을 개관했다.
노리타카는 1945년 일본 패망 후에도 미국 군정청의 특별허가로 한국에 남아 도요지 조사를 계속하다가 공예품 3천여 점과 도편(陶片) 30상자를 조선민족미술관의 후신인 국립민족박물관에 기증하고 1946년 11월 일본으로 돌아가 1964년 1월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일제강점기 많은 일본인이 도자기나 그림은 물론 불상, 석탑, 무덤 부장품까지 강탈하고 도굴해 가져갔지만 그는 자칫 사라지거나 묻힐 뻔한 숱한 문화유산을 발굴하고 수집해 한국인에게 선물한 것이다. 국립민족박물관은 1950년 국립중앙박물관에 흡수됐다.
조선 예술에 관한 식견은 형이 윗길이었지만 조선인과 하나가 되려는 마음은 동생이 더 깊었다. 다쿠미는 바지저고리 차림에 망건을 쓰고 외출하는가 하면 한국어를 쓰고 한국 음식을 지어 먹었다. 술도 막걸리를 즐겨 마셨고 거처는 온돌방이었으며 방안에 조선 장롱을 두고 살았다.
넉넉지 않은 형편인데도 어려운 이를 보면 주머니를 털었고, 고학생들에게 정기적으로 장학금도 주었다. 야나기는 “다쿠미만큼 조선 예술을 알고 조선 역사에 통달한 사람은 있겠지만, 그처럼 조선인의 마음으로 들어가 그들과 산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라고 평했다.
그는 1931년 2월과 3월에 걸쳐 묘목 기르기에 관한 강연을 하러 전국을 다니다가 과로에 급성폐렴이 겹쳐 4월 2일 40살의 나이로 순직했다. “나는 죽어도 조선에 있을 것이니 조선식으로 장례를 지내 달라”는 유언에 따라 이문리(지금의 서울시 동대문구 이문동)에 안장되던 날, 조문객이 구름처럼 모였고 서로 상여를 메겠다고 나섰다.
이문리 묘소는 1942년 7월 새로 길이 나는 바람에 망우리로 옮겨졌다. 해방 후 아내와 딸이 일본으로 돌아가자 돌보는 이가 없어 덤불에 덮이고 묘비도 넘어져 뒹굴다가 1964년 방한한 화가 가토 쇼린이 임업시험장 직원들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찾아 새로 꾸몄다. 임업시험장 직원들은 1984년 8월에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라고 새긴 기념비를 세웠다.
일본에서는 다쿠미의 일대기를 그린 책 ‘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1982년)과 전기소설 ‘백자 같은 사람’(1994년)이 출간됐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백자의 사람, 조선의 흙이 되다’도 한일 양국에서 개봉했다. 고향인 호쿠토시에는 형제 자료관이 들어섰고, 조선일보는 2015년 광복 70주년을 맞아 다쿠미를 ‘한국을 빛낸 세계인 70인’에 선정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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