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황제에 맞서 싸운 일본 여성 가네코 후미코

독립운동가 박열의 동지이자 아내인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는 한복 차림으로 법정에 나와 자신을 한국식 이름 박문자로 불러 달라고 요구했다. 사형 선고가 눈앞에 닥쳤어도 천황제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희용 승인 2024.12.24 08:00 | 최종 수정 2024.12.24 10:48 의견 0
독립운동가 박열의 아내 가네코 후미코


일제강점기 도쿄의 법정에서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쳐 법정을 아수라장으로 만든 일본 여인이 있었다. 이름은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동지이자 남편 박열과 함께 천황 부자 암살을 기도한 대역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가네코는 1903년 1월 25일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정식 부부가 아니어서 출생신고조차 돼 있지 않은 데다 양쪽 모두 양육을 거부해 학교에도 제때 들어가지 못한 채 친척집을 전전하며 천덕꾸러기로 자랐다. 1912년 충북 청원의 고모 집에 맡겨져 7년 동안 하녀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다가 식민지에서 신음하던 조선인에게 동질감과 연민을 느꼈다.

1919년 도쿄로 돌아와 생활비를 벌어 학교에 다니며 사회주의와 아나키즘 사상에 빠져들었다. 조선인 유학생들과도 교류하며 일평생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편에 서서 싸우기로 결심했다. 그는 옥중 수기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에서 이렇게 술회했다.

“나를 부유한 가정에 태어나지 않게 하고 가는 곳마다 생활의 모든 범위에서 괴롭힐 만큼 괴롭혀준 나의 모든 운명에 감사한다. 아무런 어려움 없이 컸다면 아마 나는 내가 그렇게도 미워하고 경멸하는 그런 사람들의 사상이나 성격이나 생활을 그대로 받아들여 결국 나 자신을 찾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1922년 2월에는 조선인 유학생 잡지 ‘청년조선’에 실린 박열의 시 ‘개새끼’를 읽고 감명받았다. 그를 찾아가 만난 뒤 연인 겸 동지가 됐다. 박열에게 “운동 활동에서는 나를 여성으로 보지 않고, 한쪽 사상이 타락해 권력자와 손잡는 일이 생기면 공동생활을 끝낸다”란 서약에 서명하게 한 뒤 동거에 들어갔다.

가네코는 박열과 함께 사회주의자 모임 ‘흑도회’에 가입했다가 흑도회가 노선 투쟁으로 분열되자 이듬해 4월 아나키스트들을 모아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한 뒤 의열 투쟁을 준비했다. 1923년 11월 황태자 히로히토의 결혼식 때 천황 가족을 폭살할 계획이었다.

박열은 중국에서 파견된 의열단 관계자에게 폭탄을 구해 달라고 부탁하는 한편 천황이 사는 궁성 우편배달부로 위장 취업해 천황 일가의 동정과 이동 경로를 살폈다. 당시 천황은 요시히토였으나 건강이 나빠져 히로히토가 섭정하고 있었다.

1923년 9월 1일 간토대지진이 일어나자 일제는 조선인이 일본인을 습격하고 우물에 독약을 풀고 다닌다는 괴소문을 빌미 삼아 조선인, 아나키스트, 사회주의자들을 대거 잡아들였다. 박열과 가네코도 불령사 회원들과 함께 9월 3일 체포됐다가 폭탄 구입 계획이 드러나 대역죄로 기소됐다. 당시 일본 형법은 천황, 황후, 황태자 등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가하려 한 자는 사형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박열과 가네코는 당당한 자세로 취조와 재판에 임했다. 박열은 조선 시대 관복 차림으로 법정에 섰고, 가네코도 한복을 입고 나와 자신의 이름을 한국식인 박문자로 불러 달라고 요구했다. 둘은 천황제의 허구성과 문제점을 폭로하고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해 법정 관계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두 사람은 사형 선고가 있기 전인 1926년 3월 1일 옥중 결혼을 하고 혼인신고까지 마쳤다. 결혼 전 후세 다쓰지 변호사의 주선과 다테마스 가이세이 판사의 배려로 가네코가 박열의 품에 안겨 책을 읽는 사진까지 찍었다. 이 사진은 나중에 공개돼 내각이 총사퇴하고 판사도 옷을 벗는 등 일본 정국을 뒤흔들었다.

1926년 3월 25일 선고된 사형은 4월 5일 무기로 감형됐다. 일본 검찰이 은사(恩赦)를 신청해 받아들여진 것이다. 가네코는 기만 술책에 항의하며 감형 통지서를 찢어버렸다. 그로부터 석 달여 만인 7월 23일 가네코는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형무소는 창살에 목을 매고 자살했다고 발표했으나 타살 의혹이 제기됐다.

형무소 측은 서둘러 시신을 인근 들판에 가매장했다. 후세 변호사가 흑우회 동지들과 함께 시신을 확인했으나 사인을 밝혀내지는 못했다. 화장한 뒤 유골을 박열 고향인 경북 문경시 문경읍 팔영리 주흘산 기슭에 안장했다. 2018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는데, 일본인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된 것은 후세 변호사에 이어 두 번째다.

박열은 22년 2개월간 복역했다가 1945년 10월 27일 석방됐다. 2차대전 이전 단일 사건으로는 일본 최장의 수감 기록이다. 재일본조선인거류민단(재일본대한민국민단의 전신) 초대 단장을 맡았고 1949년 영구 귀국했다. 6·25 때 납북됐다가 1974년 북한에서 별세해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1989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됐다.

박열의사기념사업회는 문경시와 함께 2002년부터 마성면 오천리의 박열 생가 주변을 박열의사기념공원으로 조성했다. 2003년 가네코 묘소를 이곳으로 이장했고 2012년 박열의사기념관도 문을 열었다. 이들 부부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 ‘열애’, 박열을 중심으로 그린 영화 ‘박열’과 뮤지컬 ‘22년 2개월’, 가네코 전기 만화 ‘나비’ 등이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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