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정략결혼의 희생양 이방자 여사

일본 황족 여인 이방자 여사는 일제 식민정책에 따라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비가 됐다. 한국인들의 따가운 시선 속에 시작한 결혼 생활이었지만 만년에는 창덕궁 낙선재를 지키며 장애인 봉사에 헌신해 많은 사람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이희용 승인 2024.12.17 08:01 의견 0
1923년 영친왕이 육군대학을 졸업할 무렵의 영친왕(왼쪽)과 이방자 여사 부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였던 영친왕은 일본 황족 여인을 배필로 맞았다. 이른바 내선(內鮮) 융화를 과시하려는 일제 식민정책의 산물이었다. 고종은 9남 4녀를 두었으나 순종 이척, 의친왕 이강, 영친왕 이은, 덕혜옹주를 제외하면 모두 성인이 되기 전에 사망했다. 순종은 자녀가 없어 1907년 황제로 즉위할 때 이복동생 영친왕을 황태자로 책봉했다.

영친왕은 책봉 후 넉 달 만에 10살의 나이로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손에 이끌려 일본으로 건너갔다. 귀족학교 가쿠슈인 중등과와 육군사관학교를 거치며 철저한 일본식 교육을 받았고 1917년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일제가 영친왕비로 낙점한 인물은 메이지 천황의 조카 나시모토노미야의 장녀인 마사코였다. 영친왕보다 4살 아래로 가쿠슈인 초·중등과를 졸업했다. 훗날 천황에 오르는 히로히토의 배우자 물망에 올랐다가 사촌 나가코에게 밀려 정략결혼의 희생양이 됐다. 일본 어의가 그를 불임(不姙) 관상이라고 판정하자 조선 왕실의 적통을 끊으려고 일부러 영친왕과 결혼시켰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이들의 약혼 소식은 1916년 8월 3일 도쿄 아사히신문에 실렸다. 영친왕은 휴가지 별장에서 신문 보도를 통해 자신의 약혼 사실을 알았다. 마사코도 자서전에서 “이럴 수가 있나? 내가 전하와 약혼하게 되다니!”라고 술회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도 같은 날 신문에 도쿄발로 보도한 것을 보면 고종과 순종도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운명으로 받아들인 마사코는 그때부터 조선식으로 머리 가르마를 타고 학교에 다녔다. 방과 후에는 집에서 개인교사에게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배웠다.

일제는 황족이 같은 황족이나 그 아래 화족(華族)하고만 결혼할 수 있도록 한 황실 전범까지 개정하며 결혼을 밀어붙였다. 고종의 완강한 반대도 소용없었다. 결혼식은 1919년 1월 25일 치러질 예정이었다가 고종이 나흘 전 급서하는 바람에 미뤄져 1920년 4월 28일 도쿄에서 거행됐다.

결혼식이 임박하자 도쿄의 영친왕 집에는 항의 편지와 협박 전화가 쇄도했다. 일본 유학생 서상한은 결혼식장에 터뜨릴 폭탄을 만들었다가 동료의 밀고로 체포됐다. 상해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은 이은을 “구녀(仇女·원수의 여자)를 취한 금수(禽獸)”라고 꾸짖는가 하면 프랑스 파리에서 김규식이 발행하던 잡지 ‘자유대한(La Coree Libre)’에도 비판 기사가 실렸다. 이들의 결혼을 못마땅하게 여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도 1907년 황태자비로 간택됐다가 파혼당한 민갑완의 사연을 크게 실었다가 압수 조치를 당하기도 했다.

영친왕비는 결혼 후 일본식으로 남편 성(姓)을 따랐다. 일본에서는 리마사코(李方子) 이왕세자비, 한국에서는 이방자 여사로 불렸다. 불임상이라는 소문과 달리 결혼 이듬해 아들 진을 낳았으나 생후 9개월 만에 숨졌다. 한 차례 유산했다가 1931년 12월에야 둘째 구를 얻었다.

영친왕은 1926년 4월 순종이 승하한 뒤에도 계속 일본에 머물러야 했다.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보병 59연대장, 근위보병 제2여단장, 오사카사단장 등을 거쳐 중장으로 육군 제1항공군 사령관까지 지냈다. 영친왕 부부는 극진한 예우를 받으며 호화 생활을 누렸으나 일제의 감시와 조선인의 따가운 시선을 피하지 못했다.

1945년 해방을 맞자 영친왕은 귀국을 서둘렀다. 이방자 여사는 한국 정세가 불안하다며 만류했다. 한국인들은 영친왕에게 동정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그의 귀국을 바라지 않았다. 미국 군정은 황족의 각종 특혜를 폐지해 생활고에 시달렸다. 1947년 일본 국적을 박탈당하고 1954년에는 살던 집도 팔아야 했다. 이방자 여사는 커튼을 뜯어 블라우스를 만들어 입을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1956년에는 영친왕 부부가 미국에 유학 중이던 아들의 MIT대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 여권 발급을 신청했으나 주일 대표부가 거절했다. 하는 수 없이 일본 정부가 발행한 임시 여권으로 미국을 다녀왔는데, 이 소식을 듣고 실망한 한국인들은 동정적 시선을 거뒀다. 1960년에는 함께 일본 국적을 얻었다.

영친왕 부부는 박정희 대통령이 귀국을 권유하자 1963년 귀국했다. 영친왕은 1959년 뇌혈전으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된 상태였다. 1970년 영친왕이 타계한 뒤 이방자 여사는 창덕궁 낙선재에 시누이 덕혜옹주와 함께 기거하며 장애인 봉사에 헌신해 ‘장애인들의 어머니’로 불렸다.

복지법인 명휘원과 장애인 대상의 자혜학교·명혜학교를 설립하는가 하면 자개와 칠보 공예를 배운 뒤 작품전과 바자회를 열어 수익금을 운영기금에 보탰다. 한국인들의 비난 속에 출발한 결혼 생활이었지만 만년에는 많은 사람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로서의 품격을 지킨 것이다.

이방자 여사는 덕혜옹주가 세상을 떠난 지 9일 만인 1989년 4월 30일, 87세를 일기로 별세해 남편 영친왕이 잠든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릉 옆 영원에 묻혔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생전에 국민훈장 모란장을 비롯해 서울특별시문화상, 적십자박애장 금장, 5·16민족상, 소파상 등을 받았고 사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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