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투쟁의 숨은 조력자 조지 쇼

아일랜드계 영국인 조지 루이스 쇼가 중국의 국경도시 안둥에서 운영하던 이륭양행은 독립운동의 비밀 거점이었다. 이곳을 통해 임시정부의 지령과 선전물이 국내로 배포됐고, 국내에서 모금한 독립자금이 임정으로 전달됐다.

이희용 승인 2024.12.12 09:36 | 최종 수정 2024.12.12 09:38 의견 0
조지 쇼우(1880~1943)

1905년 경의선이 개통한 지 6년 만에 신의주와 중국 안둥(安東·지금의 단둥)을 잇는 압록강 철교가 놓였다. 한반도와 중국 대륙이 철도로 연결된 것이다. 안둥에는 아일랜드계 영국인 조지 루이스 쇼가 운영하던 무역회사 이륭양행이 있었다. 이륭양행은 홍콩에 본사를 둔 영국계 해운회사의 대리점도 겸했다.

쇼는 1880년 1월 25일 중국 푸젠(福建)성 푸저우(福州)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선원 출신으로 무역업에 종사했고 어머니는 일본인이었다. 쇼는 중국에서 성장한 뒤 1900년 한국 금광회사의 회계로 근무하다가 1907년 국경도시 안둥의 영국 조계지에 이륭양행을 설립했다. 1912년 일본인 여성과 결혼해 두 아들을 낳았고 둘째도 일본인 아내를 맞았다.

1919년 4월 11일 출범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7월 10일 국무원령 제1호로 내무부 산하 지방 행정조직인 연통제(聯通制)를 공포하고 교통부 산하에 비밀 연락망인 교통국을 설치했다. 교통국 가운데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곳은 안둥교통지부로 이륭양행 2층에 사무실을 두었다.

나중에 안둥교통사무국으로 이름을 바꾼 안둥교통지부의 임무는 임시정부의 각종 지령과 선언문 등을 국내에 배포하고 국내 사정을 임시정부에 보고하는 것이었다. 양국을 오가는 임정 요인들의 길잡이와 독립자금의 전달 역할도 맡았는데, 이륭양행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들이었다.

쇼는 임정 수립 전부터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을 헌신적으로 도왔다. 김구는 3·1운동 직후 동지 14명과 함께 이륭양행 배를 타고 안둥에서 상하이(上海)로 피신했다. 대한제국 고위직을 역임한 김가진이 아들 김의한과 함께 1919년 10월 중국으로 망명해 임정에 합류할 때도 쇼의 도움을 받았다.

임정 자금 조달책이던 김의한의 아내 정정화는 “안둥에서 이륭양행의 배만 타면 바로 상하이로 갈 수 있기 때문에 저으기 안심이 됐다”고 술회했다. 비록 무산되긴 했지만 의친왕 이강도 이륭양행을 통해 망명하려 했다. 이륭양행의 신용과 네트워크 덕이었다.

일제는 쇼를 눈엣가시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당시 조선총독부의 아카이케 아쓰시(赤池濃) 경무국장은 “쇼를 체포하지 않으면 불령선인(不逞鮮人)의 뿌리를 뽑을 수 없다”면서 강경책을 주장했고, 사이토 마코토(齊藤實) 총독도 “외국인이라도 나쁜 놈은 나쁜 놈”이라며 적의를 드러냈다. 1920년 7월 11일, 일본 경찰은 아내와 아들을 마중하러 신의주로 건너온 쇼를 체포해 내란죄로 기소했다.

영국 정부와 의회는 거세게 항의했다. 영국 언론도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 국제적으로 반일 여론이 고조되자 부담을 느낀 일본 정부는 총독부를 설득했다. 쇼는 4개월여 만인 11월 19일 풀려나 안둥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1월 상하이 임시정부를 방문해 대대적인 환영과 함께 금색공로장을 받았다.

그 뒤로도 쇼는 의열단원과 군수품 등을 배로 실어나르는가 하면 임정에 권총을 구해주기도 했다. 님 웨일스가 쓴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본명 장지락)은 “쇼는 한 푼도 받지 않고 오로지 동정심에 스스로 한국을 도와주었다. 한국인 테러리스트들은 몇 년 동안 그의 배로 돌아다녔고 위험할 때는 안둥에 있는 그의 집에 숨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일제는 만주 침략을 본격화하며 국경지대 단속을 강화한다는 명분으로 이륭양행 선박을 불법 조사하고 어용 선박회사에 거액의 보조금을 주어 경제적 압박을 가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군부까지 나서 영업을 방해하자 쇼는 압록강 항로권과 선박을 팔고 1938년 푸저우로 옮겨갔다.

쇼는 푸저우에서 석유 판매 등의 사업을 벌였으나 그곳에서도 일제의 핍박을 받다가 1943년 11월 13일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유족을 찾지 못해 훈장을 보관해오다가 49년이 지난 2012년 8월 손녀 마조리 허칭스 씨에게 전달했다.

어머니, 아내, 며느리까지 모두 일본인인 쇼가 신변의 위험까지 무릅쓰면서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을 도운 것은 동병상련을 느꼈기 때문이다. 12세기부터 영국의 지배를 받던 아일랜드는 1916년 부활절 봉기를 계기로 독립을 선언한 뒤 1919년 1월 21일부터 독립전쟁을 벌여 1921년 12월 6일 마침내 독립을 쟁취했다.

쇼는 감옥에서 풀려난 뒤 이륭양행 직원 김문규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세계의 대세를 보면 아일랜드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 인도의 독립도 가까워졌다.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대들이 만족할 만한 일은 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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