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판 쉰들러’ 후세 다쓰지

후세 다쓰지 변호사는 간토대지진 때 조선인들을 피신시키고 조선인 학살의 진상을 폭로해 ‘일본판 쉰들러’로 불린다. 박열 등 독립운동가들의 변호에 앞장서는가 하면 토지를 강탈당한 농민과 차별에 시달리는 백정들도 도왔다.

이희용 승인 2024.12.31 08:00 의견 0
변호사 시절 후세 다쓰지의 모습


지금까지 우리 정부가 건국훈장 등을 준 독립유공자는 모두 1만8,162명이다. 이 가운데 외국인은 76명이고 2명의 일본인이 포함돼 있다. 그들의 조국에 반기를 들고 식민지 백성을 편든 것이다. 인권변호사 후세 다쓰지가 2004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고, 그가 변호한 가네코 후미코(박문자)에게 2018년 애국장이 추서됐다.

나치 독일에서 유태인들을 구한 사업가에 빗대 ‘일본판 쉰들러’로 불리는 후세는 1880년 11월 13일 일본 미야기현에서 태어났다. 1902년 도쿄의 메이지법률학교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해 검사대리로 임용됐으나 1903년 사표를 내고 변호사가 됐다. 생활고에 시달린 끝에 딸과 동반 자살하려 한 여성을 살인미수죄로 기소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자 검사복을 벗는 길을 택한 것이다.

그는 1910년 일본의 대한제국 병탄을 제국주의 침략으로 보고 조선의 독립운동을 옹호했다. 1911년 논문 ‘조선 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함’을 발표해 일본 검찰의 호된 취조를 받았다. 1919년에는 2·8 독립선언을 주도한 조선인 유학생 최팔용, 송계백 등의 무료 변론을 맡아 무죄를 주장했다.

그가 처음 조선을 방문한 것은 1923년 8월이었다. 조선총독부를 폭파하려고 폭탄을 반입했다가 체포된 의열단원 김시현을 변호하기 위해서였다. 이밖에도 재일조선인 유학생 사상단체 북성회가 주최하는 순회 강연에 나서는가 하면 백정들의 신분 철폐 모임인 형평사 관계자들을 격려하는 등 바쁜 일정을 보냈다.

1923년 9월 1일 일본 도쿄와 주변 지역을 잿더미로 만든 간토대지진이 일어나자 일본 정부는 흉흉한 민심을 달래려고 “조선인들이 시내 곳곳에 불을 지르고 다닌다”거나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등의 괴소문을 퍼뜨렸다. 성난 일본인들은 자경단을 만들어 조선인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후세는 공포에 떠는 조선인 100여 명을 피신시키고 숙식을 제공했다. 유언비어를 날조한 계엄 당국과 경찰서를 항의 방문해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한편 독자적인 조사에 나서 이듬해 9월 보고서를 냈다. 보고서에서 “조선인이 살해당한 상황은 글로 차마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하다”면서 “쇠갈고리·죽창·철사·권총·일본도 등을 사용한 방법에 몸서리가 쳐진다”고 폭로했다.

1926년 3월 두 번째로 조선을 방문했을 때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사죄문을 보냈다. “일본인으로서 모든 조선 동포들에게 조선인 학살 문제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사죄를 표명하고 자책을 통감합니다.”

일제는 간토대지진 때 사회 혼란을 막는다는 핑계로 사회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 등 사상범을 대거 잡아들였다. 아나키즘 단체 불령사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박열과 애인 가네코 후미코도 천황 부자를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체포됐다.

후세는 법정에서 “조선인 학살 범죄를 감추려고 대역죄를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둘 다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무기형으로 감형됐다. 그는 이들의 옥중 결혼을 도왔다. 가네코가 감옥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자 시신을 발굴해 화장한 뒤 집에 안치했다가 박열 형에게 전해주었다.

1924년 1월에는 의열단원 김지섭이 도쿄 황궁 앞에 폭탄을 던졌다. 김지섭 변호도 그의 몫이었다. 이듬해 조선에 을축대홍수가 일어나자 수재민 구호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1926년에는 동양척식회사에 농토를 빼앗긴 전남 나주군 궁삼면 농민들이 혈서와 소송의뢰서를 들고 일본까지 찾아와 도움을 요청했다. 그가 의롭고 불쌍한 조선인을 돕는다는 소문이 외진 농촌에까지 퍼진 것이다.

그가 오자 궁삼면에는 “왔소! 왔소! 후세 씨 우릴 살리러 또 왔소!”라고 적힌 환영 벽보가 나붙었다. 그는 총독부에 거세게 항의하고 비판 여론을 불러일으켜 동양척식회사가 일부 토지를 농민에게 반환하도록 함으로써 기대에 부응했다.

이후에도 후세는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을 변호하기 위해 1927년 10월과 12월 조선을 방문했다. 군국주의로 치닫는 일본 정부에 맞서다가 변호사 자격을 세 번이나 박탈당하고 1933년과 1939년 각각 3개월과 400일간 옥고를 치렀다. 1944년에는 반전운동을 벌이던 셋째 아들이 옥사하는 아픔을 겪으면서도 “전쟁터에서 죽은 것보다 감옥에서 죽은 것이 장한 일”이라고 의연하게 말하기도 했다.

후세는 광복 후에도 재일동포들의 민족학교 설립과 차별 철폐 투쟁을 도우며 관련 사건의 변호를 도맡았다. 1949년 4월에는 귀국하는 박열에게 자신이 쓴 ‘조선 건국 헌법초안 사고(私考)’를 선물하며 신생 대한민국의 발전을 기원했다.

1953년 9월 13일 그가 타계하자 재일동포들은 슬픔에 빠졌다. 재일동포 승려 유종묵은 장례식에서 “선생님은 우리에게 아버지·맏형이나 다름없고 구원의 배와 같은 존재였다”라는 조사를 바쳤다. 도쿄 조자이지(常在寺)에 세워진 그의 묘비에는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란 생전의 좌우명이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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