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멜은 왜 13년간 허드렛일만 했을까

하멜은 ‘하멜표류기’를 써서 처음으로 조선을 유럽에 알렸다. 하지만 조선은 그 이후에도 유럽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희용 승인 2024.05.21 08:00 의견 0
전남 여수 하멜전시관 앞에 세워진 하멜 동상. 그의 고향 네덜란드 호린험시가
헨드릭 하멜 박물관을 지으면서 설치한 것을 복제해 한국에 기증한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정착 서양인 벨테브레이(박연)가 조선 땅을 밟은 지 26년 만인 1653년(효종 4년), 선원 64명을 태운 스페르베르호가 일본 나가사키로 항해하던 중 폭풍을 만나 제주도 용머리해안 인근에 좌초했다. 생존자 36명 가운데는 헨드릭 하멜도 있었다. 한자식으로는 함매아(唅梅兒), 혹은 합매아(哈梅兒)라고 불렀다.

조선 조정은 같은 네덜란드 출신의 박연을 제주도에 보내 통역을 맡겼다. 한복 차림의 박연을 본 하멜 일행의 표정에는 놀라움과 반가움이 교차했다. 박연은 오랫동안 모국어를 쓰지 않은 탓에 한동안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다가 며칠간 대화를 나눈 뒤에야 네덜란드어가 능숙해졌다고 한다.

하멜 일행은 효종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일본으로 보내 달라고 간청했으나 거절당했다. 효종은 이들이 지닌 총포 제작술을 북벌 준비에 활용하려고 훈련도감에 배속시켰기 때문이다. 박연도 “표착한 외국인을 본국으로 송환하지 않는 게 조선 국법”이라며 귀화를 설득했다.

그러나 하멜 일행은 박연과 달리 조선에 눌러살 생각이 없었다. 제주도에서 배를 빼앗아 탈출하려다 붙잡히는가 하면 한양(서울)을 찾은 청나라 사신에게 억울한 처지를 호소하는 소동도 벌였다. 청나라 사신에게는 뇌물을 주어 묵인하도록 했다.

조선 조정은 이들을 한양에 두면 청나라의 의심을 살지 모른다고 우려해 전남 강진의 전라병영성에 내려보냈다. 일행 가운데 일부는 조선 여인과 결혼해 아이를 낳기도 했다. ‘병영(兵營) 남씨(南氏)’라는 본관과 성씨도 받았다고 하는데, 후손은 확인되지 않는다.

혹독한 기근이 닥치자 전라병마절도사는 이들을 전남 여수의 전라좌수영과 순천, 전북 남원에 분산 배치했다. 좌수영의 하멜 일행 5명과 순천에 있던 3명은 어선을 구입해 1666년 일본으로 탈출했다.

일본은 이들을 나가사키 데지마에 있는 네덜란드 상관(商館)으로 인계했다. 네덜란드는 일본을 통해 그때까지 살아남은 나머지 선원 8명의 송환을 조선에 요구했다. 하멜 일행의 탈출 소식을 까맣게 몰랐던 조선 조정은 발칵 뒤집어졌다. 송환을 거부할 명분이 없어 남은 선원들도 네덜란드로 돌려보냈다.

2년 뒤 고향에 도착한 하멜은 밀린 임금을 받으려고 동인도회사에 보고서를 썼다. 이를 토대로 네덜란드와 프랑스에서 출판된 책이 ‘하멜표류기’다. 네덜란드를 떠난 뒤 조선 억류 생활을 거쳐 다시 돌아올 때까지의 일들을 기록한 일지와 함께 조선의 지리, 풍토, 물산, 정치, 군사, 종교, 교육 등 각종 정보를 담았다.

조선의 실상을 유럽에 상세히 알린 최초의 책으로 13년간 직접 보고 들은 경험을 담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그러나 글을 쓴 동기가 돈을 받아내기 위한 것이어서 고생담을 부풀렸다는 평가가 있다.

하멜 일행이 살았던 강진군 병영성에는 하멜 일행이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성벽이 남아 있다. 하멜기념관과 네덜란드식 풍차 등을 관람할 수 있는 하멜촌도 꾸며놓았다. 이들이 처음 발을 디딘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에는 하멜기념비와 하멜상선전시관, 이들이 머물다 탈출한 여수에는 하멜전시관과 하멜등대가 각각 들어서 있다.

세 곳에는 모두 하멜 동상이 세워졌다. 강진과 여수의 동상은 그의 고향 네덜란드 호린험시가 하멜박물관을 지으면서 설치한 것을 복제해 한국에 기증한 것이다. 하멜기념관은 일본 나가사키에도 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을 지배한 도쿠가와 막부는 나가사키에 네덜란드 상관을 두어 서양 무역을 독점하게 했다. 포르투갈이 일본에 먼저 들어왔으나 포르투갈인들의 적극적인 선교로 천주교 신자가 늘어나자 추방하고 기독교를 금지했다. 대신 선교에는 관심이 없고 무역에만 몰두하는 개신교 국가 네덜란드의 상관이 들어섰다.

네덜란드 상관을 통해서는 상품만 오간 것이 아니었다. 유럽 각국의 정세와 근대 과학기술이 일본으로 들어왔으며,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각종 정보가 유럽으로 전해졌다. 이때 일본에 전래된 서양 근대 학문을 네덜란드의 한자식 이름 화란(和蘭)을 따서 난학(蘭學)이라고 부른다.

이에 반해 조선은 소중한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총포 제작만이 아니라 항해술, 축성술, 근대 의술 등을 보유한 서양 기능인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채 허드렛일이나 시키며 방치하다시피 했다.

하멜 탈출 200년 뒤 미국 상선과 프랑스 군함이 잇따라 들어올 때까지도 조선은 유럽 여러 나라가 어떻게 정치 제도를 바꾸고 경제 발전을 꾀했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깜깜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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