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장로교회의 아버지 모펫 선교사

모펫 선교사는 평양을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만들었다. 그가 세운 장대현교회에서 한반도 전역을 회개와 찬양의 물결로 뒤덮은 평양대부흥운동이 시작됐다. 그가 길러낸 목회자들은 해방 후 월남해 한국 개신교를 이끌었다.

이희용 승인 2024.08.27 09:34 | 최종 수정 2024.08.27 09:37 의견 0
한국장로교 발전의 거목 모펫(마포삼열) 선교사

한때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렸다. 1906~1907년 한반도 전역을 회개와 찬양의 물결로 뒤덮은 영적 각성운동이 이곳을 중심으로 일어났기 때문이다. 평양대부흥운동의 불을 댕긴 인물은 길선주 목사였지만, 그를 신앙의 길로 이끌고 평양을 믿음의 본산으로 만든 이는 새뮤얼 오스틴 모펫 선교사였다. 한국 이름은 마포삼열(馬布三悅)이다.

그는 1864년 1월 25일 미국 인디애나주 매디슨카운티에서 태어났다. 1889년 미국 북장로회의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뒤 이듬해 자신의 26번째 생일에 한국 땅을 밟았다. 한동안 서울에 머물며 한국어를 공부하고 언더우드가 만든 예수교학당(경신학교 전신) 책임자를 맡았다.

북부 지방으로 3차례 전도 여행을 다니다가 평양을 선교 거점으로 활용하려고 마음먹고 거처를 옮겼다. 평양을 중심으로 한 평안도는 조선 시대 내내 차별을 받아 신분 질서가 비교적 느슨한 데다 중국과 가깝고 상업이 발달해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이었다.

역사의 우연인지 신의 섭리인지 알 수 없는 사건도 영향을 미쳤다. 1866년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온 미국의 무장상선 제너럴셔먼호가 성난 평양 주민에 의해 불탔을 때 로버트 저메인 토머스 선교사도 선원들과 함께 목숨을 잃는다. 평양의 포졸 박영식은 토머스가 가져온 한문 성경의 종이 질이 좋은 것을 알고 뜯어서 집을 도배하는 데 썼다가 성경 구절을 읽고 감화돼 예수를 영접한다.

박영식 집이 여관으로 바뀐 뒤 이곳에 들른 모펫은 벽에 붙은 성경을 발견하고 토머스의 사연을 알게 됐다. 모펫은 토머스 덕분에 복음을 접한 이들을 모아 1893년 2월 첫 예배를 올렸다. 널다리골교회의 시작이다. 널다리골교회는 평양대부흥운동의 발원지인 장대현교회로 발전했다. 모펫은 평양에 남대현교회, 사창골교회, 산정현교회 등도 개척했다.

모펫은 신학교도 세웠다. 1901년 평양에서 방기창, 김종섭 두 학생으로 신학반을 꾸렸다. 이는 평양신학교를 거쳐 장로회신학대(장신대)로 발전했다. 남북 분단 후 1948년 서울 남산에서 다시 문을 열었다가 1960년 광진구 광장동으로 이전했다. 모펫은 숭의여중고와 숭의여대의 전신인 숭의여학교도 설립하고 숭실중고와 숭실대 전신 숭실학당 교장을 맡는 등 교육운동에도 헌신했다.

그가 지닌 보수주의·복음주의 신학관은 제자와 신도에게 이어져 오늘날 우리나라 장로교의 특성을 이뤘다. 박형룡, 한경직, 송창근, 김재준 등 해방 후 한국 개신교를 이끈 지도자들이 그의 후계자다. 오늘날 우리나라 개신교인 가운데 70% 이상이 장로교 소속이다. 씨앗을 뿌린 인물이 언더우드라면 못자리를 만든 이는 모펫이다. 그가 ‘한국 장로교회의 아버지’로 불리는 까닭이다.

모펫은 외국인 선교사 가운데서 가장 전도에 열심이었다. 의료나 교육을 통한 우회적인 방법보다 복음을 알리는 데 주력했다. 당시에는 외국인 선교사를 두고 “눈이 파랗고 코가 큰 서양인이 혼을 빼놓는다”는 허황된 소문이 떠돌았다. 그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낮에는 노방 전도에 나서고 밤에는 집집마다 사랑방을 돌았다. 많은 편지를 남겨 ‘편지 쓰는 선교사’로 불리기도 했다.

1911년 데라우치 조선총독 암살 기도를 조작해 독립운동가들을 대거 체포한 105인 사건이 일어나자 총독부를 찾아가 항의하는 한편 미국 장로회본부에 불법구금과 고문 사실을 보고해 국제여론을 일으켰다. 1919년 3·1운동 후 일제가 학교 교과 과목에 성경을 폐지할 것을 요구했을 때도 완강히 거부했다.

1934년 70세를 맞아 은퇴한 뒤에도 평양에 머물다가 1936년 7월 경기도 소래(지금은 인천광역시 소속)로 휴가를 떠났다가 열사병에 걸려 언어장애를 겪었다. 요양차 9월 24일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1939년 10월 24일 눈을 감았다. 캘리포니아 샌타바버라 근교 카핀테리아 공동묘지에 묻혔다가 2006년 장신대 이상조기념도서관 앞뜰로 옮겨졌다.

아들들도 아버지의 유업을 계승해 한국에서 봉사했다. 5형제 가운데 3남 휴 모펫(마삼락) 목사는 1955년 11월 내한해 안동선교부에서 활동하고 장신대 교수를 지냈다. 아세아연합신학대 초대 학장, 연세대·숭실대·대한성서공회 이사 등도 역임했다. 4남 하워드 모펫(마화열)은 1948년 12월부터 45년간 대구 동산병원 의사로 일했다. 6·25 전쟁 때 미국 해군 군의관으로 참전해 9·28 서울 수복작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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