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도 잊어서는 안 되는’ 헐버트 박사

1999년 8월 5일 50주기에 맞춰 헐버트기념사업회가 양화진 묘지에 세운 추모비에는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고 자신의 조국보다 한국을 위해 헌신했던 빅토리아풍의 신사 헐버트 박사 이곳에 잠들다”라고 새겨져 있다.

이희용 승인 2024.08.13 08:00 | 최종 수정 2024.08.13 10:16 의견 0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외국인'으로 불리는 미국인 독립운동가 호머 헐버트.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제공]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는 호머 헐버트의 무덤이 있다. 묘비 가운데는 김대중 대통령 글씨로 이름을 새겨놓았다. 왼쪽에는 “일천팔백육십삼년 일월 이십육일 미국에서 탄생, 일천구백사십구년 팔월 오일 서울에서 별세, 선각자요 한국의 친우인”, 오른쪽에는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도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라고 적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이승만 대통령이 묘비명을 쓰기로 했다가 약속을 지키지 못하자 1999년 김 대통령이 대신 쓴 것이다.

그 옆에는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가 50주기를 맞아 세운 추모비도 있다. 여기에 적힌 글귀는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고 자신의 조국보다 한국을 위해 헌신했던 빅토리아풍의 신사 헐버트 박사 이곳에 잠들다”이다.

헐버트가 어떤 인물이기에 대통령이 묘비명 글씨를 쓰고 기념사업회는 이 같은 찬사를 남겼을까. 대한민국 정부는 1950년 외국인 최초로 건국훈장(독립장)을 추서하고 2014년 금관문화훈장을 후손에게 전달했다. 안중근 의사는 뤼순(旅順)감옥에서 일본 경찰이 헐버트에 관해 묻자 “한국인이라면 하루도 잊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라고 대답했다.

헐버트는 미국 버몬트주 뉴헤이븐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미들베리대 총장을 지낸 목사이고, 어머니는 다트머스대 창립자의 외증손녀였다. 다트머스대를 졸업하고 유니언신학대를 수료한 뒤 1886년 7월 5일 조지 길모어, 달젤 벙커와 함께 육영공원(育英公院) 교사로 부임했다. 육영공원은 양반집 자제와 관리들에게 영어와 서양식 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최초의 근대식 관립 교육기관이다.

육영공원의 교과 과목은 영어, 자연과학, 수학, 지리, 각국의 역사와 정치 등이었다. 헐버트는 ‘양반과 평민 모두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이란 뜻으로 ‘사민필지(士民必知)’란 제목의 한글 교재를 만들었다. 자연 현상의 원리, 인간의 출현과 이동, 각국의 지형·산업·정치·종교 등을 담아 한문본과 국한문 혼용체로 펴냈다.

헐버트는 조선인들을 가르치려고 우리말을 배우다가 한글의 과학성과 편리성에 흠뻑 빠져 한글을 연구했다. 1892년 1월 한국 최초의 영문 월간지 ‘한국 소식(The Korean Repository)’ 창간호에 ‘한국의 알파벳’이란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3월호에는 한글의 창제 과정을 설명하는 글을 싣고 1898년 2월호에는 이두를 소개했다. 아래아(ㆍ)를 없애고 띄어쓰기를 도입하자고 주장해 한글 맞춤법 정비에도 크게 기여했으며, 한글의 로마자 표기법도 처음 고안했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도 관심이 많았다. 1901년부터 4년 동안 자신이 창간한 영문잡지 ‘한국 평론(Korea Review)’에 한국사에 관한 글을 연재했다. 한자로 쓴 5권짜리 한국 역사책 ‘대동기년’을 중국에서 출간한 데 이어 최초의 영문 한국사를 미국에서 펴냈다.

일본 궁내부대신 다나카 미쓰야키가 개성 경천사 터에서 고려시대 10층석탑을 해체한 뒤 도쿄의 자기 집 뜰에 옮겨놓자 헐버트는 무단 반출 현장 사진을 찍고 주민 증언을 수집해 일본 영어신문 ‘재팬 크로니클’에 폭로했다. ‘뉴욕타임스’ 등 해외 유력 언론도 “야만적인 문화재 약탈”이라는 내용의 비판 기사를 싣자 1918년 돌려받을 수 있었다.

헐버트는 우리나라 민요를 대표하는 ‘아리랑’을 서양식 음계로 처음 채보했다. 1896년 2월 ‘한국 소식’에 ‘문경새재 아리랑’과 함께 경기민요 ‘군밤타령’, 시조 ‘청산아’ 등의 악보를 실었다. 그는 “아리랑은 한국인에게 쌀과 같은 존재여서 언제 어디를 가든 들을 수 있다”면서 “한국인은 즉흥곡의 명수여서 완성된 곡이나 음계 없이도 노래를 잘 부른다”고 평했다.

1896년 4월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창간할 때도 인쇄시설과 관련 지식을 제공하고 편집고문 역할도 맡았다.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와 미국 AP통신 객원 특파원으로도 활동하며 한국의 실상을 해외에 알렸다. 한성사범학교 교장, 관립중학교 교사 등으로 교육에 힘쓰는 한편 기독교청년회(YMCA) 준비위원장과 초대 회장을 맡아 청년운동 체육 보급에도 앞장섰다.

그는 교육자일 뿐 아니라 한글학자ᆞ·역사학자이자 문화운동가였고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다. 1895년 춘생문 사건을 일으켜 고종을 피신시키려다가 실패했다. 1905년 10월 고종의 친서를 갖고 미국 특사로 파견돼 을사늑약을 막으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미국이 한국을 일본에 넘겼다”며 모국의 태도를 거세게 비난했다. 1907년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네덜란드 헤이그에서도 각국 대표들에게 일제의 침략 야욕을 고발했다. 그가 이상설·이준·이위종에 이어 ‘제4의 헤이그 특사’로 불리는 까닭이다.

일본의 눈엣가시가 된 헐버트는 더는 한국에 머물지 못했다. 미국에서 순회 강연이나 기고 등을 통해 한국 독립을 주장하고 미국의 한국 정책을 비판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연방 상원 외교위원회에서 일제의 잔학성을 고발하기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헐버트 박사가 정부 수립 기념식 단상에 있어야 한다”며 초청했으나 부인의 병세가 깊어 오지 못했다. 그해 겨울 부인을 여읜 뒤 1949년 7월 29일 한국 땅을 밟았다. 그러나 장거리 여행의 피로를 이기지 못한 채 8월 5일 청량리 위생병원(현 삼육서울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8월 11일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사회장이 치러졌다 그의 뜻에 따라 양화진에 먼저 묻혀 있던 아들 곁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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