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성 의료인의 어머니 로제타 셔우드 홀

로제타 셔우드 홀은 이화의료원 전신인 보구녀관 책임을 맡아 여성 환자들을 진료하고 병원을 설립하는 한편 많은 여성 의료인을 길러냈다. 아들 셔우드 홀은 해주에 결핵전문병원을 세우고 크리스마스 실을 발행했다.

이희용 승인 2024.09.03 08:00 의견 0
로제타 셔우드 홀(가운데) 가족이 박에스더(왼쪽) 부부와 함께 촬영한 사진. 홀 여사 품에 안긴 아기가 딸 이디스이고 왼쪽은 아들 셔우드다. (이화여대의료원 제공)



제중원에서 일하던 윌리엄 스크랜턴이 1886년 ‘미국인 의사병원’(시병원으로 개칭)을 개업했다. 여성 환자들이 남자 의사에게 몸을 맡기려 하지 않자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은 미국 감리교 여성해외선교부에 여의사 파견을 요청했다. 1887년 10월 메타 하워드가 입국하자 서울 정동의 이화학당 구내에 여성 전용 병원 보구녀관(普救女館)을 따로 차렸다. 하워드는 1887년 10월 31일 첫 환자를 진료했다. 이화여자대학교 의료원은 이날을 출발로 삼고 있다.

메타 하워드는 과로로 건강을 해쳐 1889년 9월 미국으로 돌아갔다. 보구녀관도 한동안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1890년 10월 2대 관장으로 부임한 인물이 미국 뉴욕 태생의 로제타 셔우드 홀(1865~1951)이다. 1년 뒤 조선에 들어온 캐나다 출신의 의료선교사 윌리엄 제임스 홀과 1892년 결혼해 이듬해 아들 셔우드 홀을 낳았다. 홀 부부가 올린 서양식 결혼식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이었다.

남편이 평양 선교책임자로 임명됨에 따라 평양으로 이사했다. 홀 여사는 1894년 국내 최초의 맹학교이자 평양맹아학교의 전신인 평양여맹학교를 설립했다. 그해 11월 남편은 발진티푸스로 사망해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묻혔다. 홀 여사는 남편을 잃은 상처를 달래고 둘째를 출산하러 아들 셔우드를 데리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듬해 1월 딸 이디스 마거릿이 태어났다.

홀 여사는 미국 곳곳에 강연을 다니며 조선 선교 자금을 모으는 한편 뉴욕맹학교 교장 윌리엄 벨 웨이트가 개발한 점자를 익힌 뒤 이를 응용한 한글점자를 만들고 성경 등을 번역했다. 평양여맹학교에 보급하기 위해서였다. 홀 여사가 만든 일명 평양점자는 박두성이 1926년 훈맹정음 점자를 창안하는 데 자극제가 됐다. 로제타 홀이 제작한 한글 학습서 ‘초학언문’(대구대 점자도서관 소장)은 2022년 1월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1897년 다시 내한한 홀 여사는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 몫까지 해내려는 듯 헌신적으로 의료봉사에 매달리고 병원도 잇따라 세웠다. 1897년 2월 평양 최초의 근대식 의료기관인 기홀병원(홀 기념병원)을 세우고 이듬해 평양 최초의 여성 전문병원인 광혜여원(평양부인병원으로 개칭)을 문 열었다. 기홀병원과 평양부인병원은 평양제중병원과 함께 1923년 평앙연합기독병원이란 이름으로 통합됐다. 안타깝게도 딸 이디스마저 1898년 6월 세상을 떠났다.

보구여관은 동대문 분원인 볼드윈진료소와 합쳐져 1912년 동대문부인병원(릴리언 해리스 기념병원)으로 재출범했다. 홀 여사는 동대문부인병원 운영을 맡아 무료 분만사업을 시작했다. 1938년에는 이곳에서 태어난 아기가 1000명을 넘어섰다. 1921년 인천에도 제물포여자시료소(인천부인병원을 거쳐 인천기독병원으로 개칭)를 열었다.

홀 여사는 여성 의료 인력 양성에도 힘썼다. 보구녀관에 의료보조훈련반을 개설해 예비 의사, 약제사, 간호사, 조산원, 간호조무사 등을 교육시켰다. 1928년 설립한 조선여자의학강습소는 경성의학전문학교, 서울여자의과대, 우석대 의대를 거쳐 고려대 의대와 간호대로 발전했다.

홀 여사가 처음 우리나라를 찾았을 때 통역을 맡은 소녀가 김점동이었다. 이화학당에서 신학문과 영어를 배웠다. 세례명을 따 김에스더로 개명한 데 이어 마부 출신 박여선과 교회에서 화촉을 밝힌 뒤 서양 전통에 따라 박에스더가 됐다. 홀 여사 주선으로 미국 볼티모어여자의과대(존스홉킨스대 전신)를 졸업하고 서재필에 이은 두 번째 의사이자 우리나라 여성 의사 1호가 됐다.

박에스더는 1910년 폐결핵으로 숨졌다. 그를 누나처럼 따르던 17세 소년 셔우드 홀은 “수많은 조선인을 데려간 결핵을 퇴치하는 전문의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1928년 결핵 전문 해주구세요양원을 세운 데 이어 결핵 퇴치기금 마련을 위해 1932년 12월 3일 크리스마스 실을 처음 발행했다.

홀 여사는 1934년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1951년 눈을 감았다. 유언에 따라 남편과 딸이 잠들어 있는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묻혔다. 홀 여사 묘역에는 아들 셔우드 홀과 며느리 매리언 버텀리 홀의 무덤도 있다. 2021년에는 인천기독병원 설립 100주년을 맞아 로제타홀 기념관이 인천시 중구 답동로에 들어섰다. 연극 ‘로제타’, 다큐멘터리 음악극 ‘로제타 홀 일기’ 등도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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