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배반한 왜군 장수 사야가

목숨 바쳐 싸운 왜군 장수 김충선

이희용 승인 2024.04.16 18:05 의견 0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에 있는 녹동사는
김충선 장군의 위패와 초상화를 모셔놓았다.


이순신 장군의 전투를 담은 연작 영화 ‘한산: 용의 출현’과 ‘노량: 죽음의 바다’에는 포로가 됐다가 “이 전쟁은 무엇을 위한 싸움이냐”란 이순신의 질문을 듣고 조선군을 돕기로 결심한 뒤 목숨 바쳐 싸우는 왜군 장수 준사(김성규 분)가 등장한다.

조선에 투항한 일본군을 항왜(降倭)라고 부른다. 반대로 일본에 귀순한 조선군은 순왜(順倭)라고 한다. 영화 속 장면은 허구지만 실제로 임진왜란 때 항왜가 적지 않았다. 적정을 탐지해 알려주고 조총 제조술을 전수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떠맡았다.

이 가운데 가장 이름난 인물은 사야가(沙也加)다. 조선군에 사로잡히거나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투항한 게 아니라 처음부터 조선군과 싸울 생각이 없었다.

22세의 나이로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일본군 제2진의 선봉을 맡아 1592년 4월 15일 부산포에 상륙하자마자 부하 500여 명과 함께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을 찾아 귀순했다. 조총과 화포를 다루고 화약을 만드는 법을 조선군에 가르쳐주는가 하면 순찰사 김수 등을 따라 참전해 경주와 울산 등지에서 숱한 전공을 세웠다.

조선 조정은 이를 가상히 여겨 자헌대부(정2품)를 제수하고 김해 김씨(金海 金氏)란 성씨와 ‘충성스럽고 착하다’는 뜻의 충선(忠善)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김충선의 본관은 다른 김해 김씨와 구분해 왕이 하사했다는 의미로 사성(賜姓) 김해 김씨라고 부른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에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어 우록(友鹿) 김씨라고도 한다.

김충선은 정유재란, 이괄의 난, 정묘호란에서 활약했고 병자호란 때도 66세의 고령으로 무공을 떨쳤다. 1642년 72세로 세상을 떠나 그가 살던 우록리에 묻히자 인근에 녹동서원을 짓고 그의 위패와 초상화를 모신 녹동사를 세웠다.

그가 지은 가사 모하당술회가(慕夏堂述懷歌)를 보면 “넓디넓은 천하에서 어찌해 오랑캐의 문화를 지닌 일본에서 태어났는가”라고 한탄하는 대목이 나온다. “앞선 문물을 보기를 원하던 중 선봉장으로 임명되자 이 전쟁이 의롭지 못하다는 걸 알지만 동방예의지국 조선에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마음을 먹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조선에 귀화하고자 결심한 이유로 요순삼대(堯舜三代)의 전통과 풍습을 사모해 동방 성인(聖人)의 백성이 되겠다는 것, 자손을 예의의 나라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것 두 가지를 들었다. 요순삼대는 중국 고대, 즉 요임금·순임금 시대와 하·은·주 왕조를 가리킨다. 우임금이 세운 하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으로 호도 모하당이라고 지었다.

일본에서는 김충선의 귀화를 인정하지 않은 것은 물론 조선의 자작극이라고 의심해왔다. 1970년대 들어 유명 소설가 시바 료타로가 우록리를 방문한 뒤 책을 펴내 분위기가 바뀌더니 임진왜란 발발 400주년인 1992년에는 일본 공영방송 NHK가 ‘출병에 대의 없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배반한 사나이 사야가’란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방송했다.

아사히신문은 “양식 있는 무사의 의로운 결단”으로 평가하는가 하면 다른 일본 언론들도 ‘일본의 양심’이나 ‘인류애의 수호자’ 등의 제목으로 그를 소개했다.

2010년에는 일본 와카야마현 기슈도쇼구(紀州東照宮)에 김충선 장군 기념비가 제막됐고, 2012년 녹동서원 앞에는 달성한일우호관이 들어섰다. 2017년 일한문화교류기금 대표단이 우록 김씨 종친회 초청으로 녹동서원과 김충선 묘소를 답사한 것을 비롯해 해마다 한일 국민이 서로 김충선 기념비와 묘소를 찾고 있다. 2020년에는 김충선의 삶을 그린 뮤지컬 ‘모하당 김충선-그가 꿈꾸는 세상’이 선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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