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대에 걸친 린튼가 사람들의 한국 사랑

1895년 한국 땅을 밟은 유진 벨은 목포와 광주에서 교회와 학교들을 세워 ‘호남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사위 윌리엄 린튼은 3·1운동 때 군산에서 만세 시위를 도왔다. 이들의 한국 사랑은 아들과 손자로 이어져 린튼 가문은 언더우드가와 함께 이주민 집안의 롤모델이 됐다.

이희용 승인 2024.10.01 08:00 의견 0
지리산에서 윌리엄 린튼(인돈)·샬럿 린튼(인사례) 부부가 네 아들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 왼쪽부터 장남 윌리엄, 4남 드와이트(인도아), 3남 휴(인휴), 차남 유진이다.


1885년 4월 5일 한국 땅을 밟은 미국 북장로교 소속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한국명 원두우)는 미국 장로교 본부에 선교사를 더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미국 남장로교는 1892년 호남 지역에 선교사 7명을 파송했다.

1895년 4월 9일 입국한 2진 가운데 유진 벨(배유지)과 로티 위더스푼 벨(배로티) 부부가 있었다. 부인이 1867년생으로 남편보다 한 살 많았다. 배유지는 목포에 양동교회를 세우고 정명여학교와 영흥학교를 설립했다. 1904년에는 광주로 옮겨 양림교회를 개척해 ‘호남 선교의 아버지’로 불렸다. 숭일학교·수피아여학교 개교와 광주제중원(현 광주기독병원) 개원에도 산파 역할을 했다.

배로티는 아들 헨리와 딸 샬럿을 남기고 1901년 세상을 떠나 서울 합정동의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지에 묻혔다. 배유지는 두 번째 부인도 교통사고로 잃고 1925년 눈을 감았다.

윌리엄 린튼(인돈)은 명문 조지아공대 전기공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였다. 제너럴일렉트릭 입사가 예정돼 있었으나 한국을 다녀온 선교사 존 프레스턴의 강연을 듣고 한국행을 결심했다. 1912년 최연소(21세) 선교사로 입국해 군산 영명학교(군산제일중고)에서 영어와 성경을 가르치다가 1917년 교장을 맡았다.

1919년 3·1운동의 불길은 나흘 뒤 군산에서도 타올랐다. 한강 이남에서는 최초의 만세 시위였다. 영명학교 기숙사와 교사 사택 등에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찍어냈고, 영명학교·멜본딘여학교(영광여중고) 학생과 궁멀교회(구암교회) 신도들이 시위를 이끌었다. 인돈도 이를 도왔다.

인돈은 그해 5월 미국 애틀랜타에서 열린 평신도대회에 참석해 3·1운동의 정당성을 알리고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는 강연을 했다. 현지 신문 애틀랜타저널에도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호소하는 글을 기고했다.

인돈은 1922년 배유지의 딸 샬럿과 결혼했다. 샬럿의 한국식 이름은 인사례가 됐다. 인사례는 1899년 목포에서 태어났으나 2살 때 어머니를 여읜 뒤 미국에서 자라다가 1912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남편과 함께 교육과 선교에 힘쓰며 전주 기전여학교 교장도 맡았다. 평소 한복을 즐겨 입고 자식들에게 지게 지는 법 등 한국식 생활풍습을 익히게 했다.

인돈은 전주 신흥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던 1937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했다. 일제는 학교를 강제 폐쇄하고 인돈 부부를 1940년 미국으로 추방했다.

이들은 광복 이듬해 한국을 다시 찾았다. 학교를 재건하며 일본 신사가 있던 자리에 공중화장실을 지었다. 한국전쟁 중에도 한국을 떠나지 않다가 1955년 대전으로 이주해 이듬해 대전기독학관을 세웠다. 1959년 4년제 대전대학(현 한남대)으로 승격하며 인돈은 초대 학장에 취임했다. 1960년 지병이 악화해 미국에서 치료받던 중 숨을 거뒀다.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인돈 부부는 아들 넷을 두었다. 3남 휴 린튼(인휴)은 6·25 때 미국 해군 장교로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했다. 미국에서 대학과 신학교를 졸업하고 부인(인애자)과 함께 한국에 들어와 전남 섬 지방을 돌며 복음을 알렸다. 1960년 순천에 수해가 났을 때 결핵이 유행하자 결핵 진료소와 요양원을 세웠다. 인애자는 결핵 퇴치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다. 4남 드와이트 린튼(인도아)도 한국에서 의료봉사에 힘쓰고 호남신학대 학장을 지냈다.

인휴 부부는 미국에서 아들 셋을 낳고 한국에서 2남1녀를 더 얻었다. 차남 스티브 린튼(인세반) 유진벨재단 회장은 연세대 철학과와 미국 컬럼비아대를 거쳐 컬럼비아대 한국학 교수를 지냈다. 유진 벨 선교 100주년을 맞아 1995년 재단을 세우고 북한 돕기에 앞장서고 있다. 1979년 이후 80여 차례나 방북했고 김일성과도 두 차례 만났다.

5남 존 린튼(인요한)은 전주에서 태어나 순천과 대전에서 자랐다. 연세대 의대 본과 1학년 때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현지로 달려가 외신기자들을 상대로 통역을 해주다가 군사정권의 미움을 사기도 했다. 1987년 서양인 최초로 의사 국가고시에 합격했고, 미국에서 전문의 과정을 밟아 미국 의사 면허도 얻었다.

1984년 부친이 교통사고로 숨지자 보상금으로 응급처치 시설을 갖춘 전문 구급차를 국내 최초로 제작해 1993년 순천소방서에 기증했다. 2005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아 할아버지·어머니와 함께 3대가 국가유공자가 됐다. 미국 국적만 갖고 있다가 2012년 특별귀화 1호로 한국 국적도 얻었다. 그가 순천 인 씨의 시조다.

연세대의대 교수와 연세대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소장을 지냈고 국민의힘 혁신위원장을 거쳐 22대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첫 부인 이지나와 둘째 부인 차혜진 사이에 1남3녀를 두었다. 인요한의 조카 데이비드 린튼(인대위) 한동대 교수는 변호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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