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병원의 역사 만든 에이비슨과 세브란스

캐나다 출신의 4대 제중원장 에이비슨은 영세성에서 벗어나고자 세계선교대회에서 도움을 호소했다. 미국인 실업가 세브란스의 도움으로 서울역 앞에 최신 장비를 갖춘 의료시설을 짓고 근대 병원의 역사를 만들어나갔다.

이희용 승인 2024.09.21 11:24 | 최종 수정 2024.09.21 11:36 의견 0
(좌)세브란스병원과 세브란스의학교를 설립한 캐나다 출신 의료선교사 올리버 에이비슨,
(우)세브란스병원 신축 자금을 희사한 미국의 실업가 루이스 헨리 세브란스


세브란스병원과 서울대병원은 모두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 제중원(광혜원)을 시발점으로 삼는다. 각각 운영권과 소유권에 무게를 둔 엇갈린 주장이어서 지금도 뿌리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제중원 운영권을 넘겨받아 세브란스병원으로 맥을 이은 인물은 제4대 제중원장 올리버 에이비슨이다. 한국식 이름은 어비신(魚丕信)이다. 1860년 6월 30일 영국 요크셔에서 태어나 6살 때 캐나다로 이주했다. 토론토의 온타리오약학교를 졸업하고 토론토대 의과대로 편입해 의사가 됐다. 모교 교수 겸 토론토 시장 주치의로 활동하던 중 1892년 선교 모임에서 만난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의 권유를 받고 미국 북장로회 소속 의료선교사 신분으로 이듬해 조선으로 건너와 제중원장으로 부임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의 예산 지원이 턱없이 부족해 제대로 된 치료를 할 수가 없었다. 에이비슨이 “이럴 거면 차라리 병원을 우리에게 넘기라”고 요구했다. 초대 제중원장 출신의 호러스 알렌 주한 미국공사도 일본에 빼앗기는 것보다 낫다며 설득했다. 재정 압박에 시달리던 고종은 1894년 9월 미국 북장로회에 운영권을 양도했다. 5년 뒤 고종은 관립의학교와 내부병원을 설립하는데, 훗날 서울대의대와 서울대병원으로 이어진다.

민간 선교병원으로 탈바꿈한 제중원은 미국 북장로회 지원으로 사정이 나아졌다. 앞선 의술과 신분에 차별을 두지 않는 진료는 선교에도 큰 도움이 됐다. 당시 노비보다 천대받던 백정 박성춘은 에이비슨이 집에까지 찾아와 정성껏 치료해준 것에 감동했다. 그는 온 가족을 데리고 교회에 다닌 것은 물론 전도에도 앞장서 서울 인사동 승동교회 탄생의 주역이 됐다.

당시 서울에는 의사 9명이 8곳의 의원과 진료소에서 나뉘어 일하고 있었다. 선교단체마다 각기 운영하다 보니 영세성을 벗어날 수 없었다. 에이비슨은 1899년 3월 캐나다로 안식년 휴가를 떠나 후원자 물색에 나섰다. 토론토에 사는 건축가 친구 헨리 고든에게서 설계도를 무료로 기증받은 뒤 1900년 4월 미국 뉴욕의 카네기홀에서 열린 세계선교대회에 참석해 교파와 교단을 초월해 도와 달라고 호소했다.

실업가 루이스 헨리 세브란스는 연설을 듣고 감복했다. 에이비슨을 만나 한국의 의료 실태와 병원 설립 계획을 꼼꼼히 물은 뒤 1만 달러를 기부했다. 지금의 원화 가치로 환산하면 1천억 원이 넘는 거금이었다. 세브란스는 에이비슨이 귀국 후 대지 마련에 어려움을 겪자 5천 달러를 더 보냈다.

에이비슨은 남대문 밖 복숭아골(중구 도동), 지금의 서울역 앞 연세재단빌딩 자리에 40병상 규모의 제중원(세브란스 기념병원)을 새로 지었다. 명실상부한 근대식 종합병원의 효시였다. 지하 1층과 지상 2층 건물에 입원실, 진찰실, 수술실, 실험실, 약국 등과 보일러, 증기탕 시설, X레이 촬영기, 압축공기 기구, 물리치료 기구 등 최신 시설을 갖췄다.

1904년 9월 23일 봉헌식과 함께 정식으로 문을 연 데 이어 10월 4일 '빛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담아 처음으로 백내장 환자를 수술했다. 1908년부터는 의학교 졸업생을 배출했다. 백정 박성춘의 아들 박서양도 이 가운데 하나였다. 2010년 방송된 SBS TV 드라마 '제중원'의 주인공 황정(박용우 분)은 그를 모델로 삼은 것이다.

1838년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 태어난 세브란스는 1876년부터 20년간 석유왕 록펠러가 세운 스탠더드 오일의 회계책임자로 일했다. 사업과 주식 등으로 모은 돈을 해외 선교와 대학 등에 기부하면서도 그때마다 "내 돈이 아니라 하나님 돈"이라며 자신을 낮췄다. 감사의 뜻을 표시하는 에이비슨에게도 "받는 당신보다 주는 나의 기쁨이 더 큽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개원 후 세브란스병원에 3만 달러를 더 기부한 뒤 1913년 세상을 떠나며 아들 존에게도 세브란스병원을 도우라는 말을 남겼다. 아들도 유언을 지켜 1934년까지 20년간 12만4천500달러를 희사한 것은 물론 생전에 만든 존 세브란스 재단을 통해 지금까지도 돕고 있다. 이 사실은 2000년대 들어 미국 북장로회 명의의 실제 후원자를 추적한 세브란스병원 관계자에 의해 뒤늦게 밝혀졌다.

에이비슨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을 겸하고 연희전문 전신인 조선기독학교 교장도 맡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캐나다장로회를 통해 일제의 만행을 해외에 알리는 한편 조선총독부 고위 관료를 만나 유혈 진압에 항의하고 한국인에게 자치를 허용할 것을 요구했다. 부상자 보호와 치료, 사망자 위문 등에도 힘썼다.

1934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와 연희전문학교 교장에서 물러나고 이듬해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도 기독인친한회 재무를 맡아 한국을 도우며 한국 임시정부 승인과 독립운동 지원을 호소했다. 195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고 1956년 미국 플로리다주 피터스버그에서 숨을 거뒀다. 아들 고든과 더글러스도 아버지를 따라 각각 농촌 계몽운동과 의료봉사에 헌신했다. 더글러스 에이비슨 부부는 서울 합정동 양화진묘지에 잠들어 있다.

세브란스병원과 세브란스의학교는 1957년 연희전문과 합병해 연세대가 됐다. 1892년 에이비슨과 언더우드의 만남이 65년 만에 통합으로 결실을 본 것이다. 오늘날 연세의료원은 서울 신촌과 강남, 경기도 용인, 강원도 원주, 인천 송도(2026년 개원 예정)의 병원과 함께 의과대, 치과대, 간호대, 보건대학원 등을 거느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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