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기 전에 ‘한류 열풍’ 예언한 게일

우리나라가 가장 비참한 지경에 놓여 있던 1세기 전, 한국 문화의 저력에 주목하며 미래를 낙관한 서양인이 있었다. 그는 우리나라를 ‘동양의 그리스’라고 일컬으며 “유사 이래 온갖 문화를 창조했고 세계에서 으뜸가는 바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희용 승인 2024.08.20 08:00 의견 0
게일 선교사


우리는 반만년 역사에 빛나는 문화 민족임을 자랑스럽게 여겨왔지만 다른 나라의 인정을 받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불과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다른 나라 사람들이 K팝이나 K드라마 등 ‘한류’에 열광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1세기 전 한국 문화의 저력을 높이 평가하며 미래를 낙관한 서양인이 있었다. 1888년 이 땅에 들어온 선교사 제임스 게일이다.

“조선은 실로 동양의 희랍(그리스)이라고 말하고픈 나라로, 일찍이 고대 유사 이래 온갖 문화를 창조했으며 세계에서 으뜸가는 바가 있었습니다. 우선 문학의 측면에서 보자면 서양을 떠들썩하게 했던 셰익스피어는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 조선으로 말하자면 임진란 이후의 인물이지만 조선에는 이미 그보다도 1천여 년 전 신라 최고운(최치원)의 문학이 당나라에 들어와 측천무후를 놀라게 하지 않았습니까? 고구려 광개토왕 비문과 같은 것은 그 웅도거업(雄圖巨業)은 접어두더라도, 단순히 문장 그것만 놓고 보더라도 천고의 걸작이며 게다가 그것은 실로 기원후 414년이라는 고대의 것에 속합니다. 그 사상, 그 문물제도에서 보아도 조선과 같이 발달한 곳은 없었습니다.”

1928년 ‘조선사상통신’에 실은 게일의 글 ‘구미인이 본 조선의 장래’의 한 대목이다. 당시는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 지배에 놓여 절망에 빠져 있었고, 주변 모든 나라가 한국을 미개한 나라로 업신여기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조선에 온 지 40년간 보면 볼수록 조선 그 자체가 심오하게 여겨져 흥미를 더해가게 됐다”면서 한국을 문필의 나라, 군자의 나라로 높이 평가했다.

게일은 1863년 캐나다 온타리오주 엠마에서 태어났다. 토론토대에 다니던 1886년 미국에서 열린 대학생 모임에서 YMCA 지도자의 연설을 듣고 조선행을 결심했다. 1888년 12월 부산에 도착한 뒤 서울, 황해도 해주, 함경남도 원산 등지를 돌며 선교에 나섰다. 한국 이름은 기일(奇一)이었다.

그는 언더우드의 한영사전 편찬을 돕고 신약성서의 사도행전,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고린도전서 등을 번역했다. 성서번역위원회에서 우리말 용어를 정할 때는 ‘여호와’의 한국어 표기를 ‘상제(上帝)’나 ‘천주(天主)’ 대신 ‘유일한 분’이란 뜻으로 ‘하나님’이라고 쓰자고 적극 주장해 관철했다. 천주교에서는 ‘하늘에 계시는 분’이란 뜻으로 ‘하느님’이라고 부른다.

1897년 미국으로 건너가 목사 안수를 받고 돌아온 게일은 1900년 서울 종로5가의 연못골교회(연동교회 전신)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이 교회는 새무얼 무어와 그래함 리 등이 1894년에 세웠다. 게일은 양반, 상민, 천민 구분 없이 이곳에 드나들도록 했다. 1904년 이명혁을 장로로 뽑았는데, 천민 출신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이었다. 뒤이어 광대였던 임공진을 장로로 추대하려고 하자 양반 신도들이 거세게 반발해 묘동교회를 따로 세우기도 했다.

게일은 기독교 교리를 쉽고 친근하게 전달하기 위해 17세기 영국의 존 버니언이 쓴 소설 ‘천로역정’을 1895년에 우리말로 옮겨 펴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번역된 서양 소설이다. 당시 신도들은 물론 지식인과 서민 사이에서도 널리 읽혀 선교에 크게 기여했다. 길선주 목사는 천로역정을 읽다가 몸이 펄펄 끓는 성령 강림을 체험한 뒤 신도가 돼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을 이끌었다.

게일은 신도 이창직과 함께 캐나다 온타리오 공립학교 교과서를 번역한 아동학습서 ‘유몽천자(牖蒙千字)’를 발간해 언더우드가 세운 경신학교의 교과서로 썼다. 외국인의 한국어 학습을 돕고자 한국어 문법책 ‘사과지남(辭課指南)’을 펴내고 한영사전, 중영사전 등도 꾸준히 편찬했다. 찬송가 1장 ‘만복의 근원 하나님’과 338장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의 가사도 그가 번역한 것이다.

그는 조선 시대 야담집 ‘천예록’과 김만중의 고대소설 ‘구운몽’을 영역해 영국에서 펴냈다. ‘구운몽’은 한국 문헌 중 전체가 외국어로 번역된 첫 작품이다. ‘춘향전’, ‘흥부전’, ‘심청전’, ‘금수전’, ‘홍길동전’, ‘옥루몽’, ‘운영전’ 등도 영어로 옮겼다. 한국학 분야의 다양한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조선의 풍물을 기록한 영문 저서 ‘한국 개관’과 구비문학 작품집 ‘한국 민담집’을 미국에서 출간하고 논픽션 ‘선봉자’와 ‘조선 민족사’도 펴냈다.

게일은 1927년 5월 연동교회에서 은퇴한 뒤에도 1년간 더 조선에 머물며 선교와 모금 활동을 하다가 1928년 영국으로 건너갔다. 거기서 여생을 보내고 1937년 1월 31일 74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연동교회는 1988년 게일 선교 100주년을 맞아 흉상을 세운 데 이어 탄생 150주년인 2013년에는 게일목사기념관과 게일학술연구원을 개설했다. 그해 세종대왕기념사업회는 한글 보급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해 게일 목사의 손녀들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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