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호의 난’을 아시나요?

이희용 승인 2024.03.26 08:00 의견 0
제주시 애월읍 고내리 해안가에 세워진 항몽멸호비(抗蒙滅胡碑)와
최영(왼쪽) 김통정 장군상(제주시청 제공)

제주시 애월읍 고내리 해안가의 다락빌레 쉼터에는 높다란 비석과 양옆에 석상이 세워져 있다. 비석 전면에는 ‘涯月邑境(애월읍경)은 抗蒙滅胡(항몽멸호)의 땅’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곳이 몽골(원나라)에 항거하고 오랑캐를 없앤 역사의 현장이란 뜻이다.

갑옷과 투구 차림에 두 손을 모아 칼을 집고 선 석상의 주인공은 몽골군에 맞서 싸우다 숨진 김통정 장군과 목호(牧胡)의 난(갑인의 변)을 진압한 최영 장군이다. 고려 무신정권의 친위대인 삼별초의 대몽 항쟁은 중고교 국사 교과서에도 등장할 정도로 비교적 잘 알려진 반면 가축(말)을 기르는 오랑캐(몽골인), 즉 목호들이 반란을 일으킨 사실은 아는 이가 드물다.

삼별초의 잔당이 진도를 거쳐 제주도로 도망치자 고려와 원나라는 1274년 여몽연합군 1만 명을 보내 평정했다. 원나라는 제주 중산간지대가 목초지로 적당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탐라총관부를 설치해 제주를 직할지로 편입시킨 뒤 사육 전문가(목호)들을 보내 말을 대규모로 방목했다. 하치(합적·哈赤)라고도 불리는 목호의 수효는 1400~1700명에 이르렀다. 1295년 제주가 고려에 반환된 뒤로도 원나라 직할 목장의 기능은 유지됐다.

공민왕이 반원정책을 펴자 목호들은 고려 관리를 살해하며 거세게 반발했다. 원나라를 북방 초원으로 밀어내고 중원을 차지한 명나라도 영유권을 주장하며 제주마 2천 필을 요구했다. 목호들은 “세조(쿠빌라이)께서 기르신 말을 적국에 바칠 수 없다”며 거절했다.

공민왕은 1374년 최영 장군에게 토벌을 명했다. 관군의 수효는 2만5000명으로 삼별초 진압군의 갑절을 훨씬 넘었다. 목호들은 완강하게 저항했으나 밝은오름, 검은데기오름, 새별오름 등지에서 크게 패했고 서귀포 앞바다 범섬까지 쫓겨갔다가 모두 죽음을 맞았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조선 초 제주 대정현 판관을 지낸 하담은 “우리 동족도 아닌 것들이 섞여들어 변을 불러왔다”며 목호의 난을 우리나라 역사상 유일한 이주민 반란으로 규정했다.

모든 사물에는 양면성이 있다. 승자의 기록만 읽으면 역사를 제대로 볼 수 없다. 삼별초의 항쟁도 삼별초의 난으로 불리다가 1970년대 이후 외세에 맞선 국난 극복의 사례로 재평가되듯이, 목호의 난도 최근 재해석 움직임이 일고 있다.

제주에 파견된 목호들은 대부분 죽을 때까지 눌러살 수밖에 없어 제주 여인과 아이를 낳고 사는 경우가 많았다. 1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원나라 위세를 믿고 횡포도 많이 부렸지만 차츰 제주인과 동화돼갔다.

일각에서는 고려 관군이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무고한 양민이 많이 희생된 것에 주목해 ‘고려판 4·3사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탐라국이 1105년 고려 숙종 때 와서야 완전히 복속되고 1214년 고종 때 제주로 이름을 고쳐 부른 것을 감안하면 당시 제주 주민에게는 고려도 몽골처럼 외세로 비쳤을지 모른다.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에는 고려 정씨 열녀비가 있다. 고려 정씨는 조정에서 벼슬을 살다가 제주로 유배 온 정한영의 손녀로 목호의 장교 백호장(百戶長)과 결혼했다. 남편이 전사한 뒤 관군 군관이 정절을 빼앗으려 했다가 정씨가 칼을 뽑아 자결하려 하자 포기했다. 정씨는 수절한 채 70대에 눈을 감았다. 세종은 열녀비를 세워 기렸고 지금의 비는 1824년(순조 24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제주의 몽골인 후손들은 조선 중기까지 대원(大元)이라는 본관을 유지했다고 한다. 이후 본관을 제주로 바꾸거나 원나라가 아닌 왕조의 중국, 혹은 한반도 본토에서 온 집안임을 자처하며 몽골계임을 감췄다는 것이다. 제주말에 몽근놈(몽골놈)이라는 욕설이 있을 만큼 몽골계는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었다.

제주는 보석처럼 소중하고 아름다운 섬이다. 우리나라 국토에 제주도가 빠졌다면 얼마나 허전하고 아쉬웠을지 상상하기조차 싫을 정도다. 그러나 제주가 한반도 부속 섬으로 편입된 뒤 주민이 겪은 고통은 아름다움과 거리가 멀다. 목호의 난도 파란만장한 제주 역사에 피와 눈물을 더한 불행한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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