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국정을 주무른 푸른 눈의 ‘목대감’

고종은 청나라 실권자 이홍장이 추천한 독일인 묄렌도르프를 차관급 외교 고문에 임명했다. 귀화하지 않은 외국인이 이처럼 고위 관료를 지낸 사례는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로도 없었다.

이희용 승인 2024.06.18 09:12 | 최종 수정 2024.06.18 09:17 의견 0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 한국이름 목인덕(穆麟德)은
독일 출신의 외교관으로 조선에서 외교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조선은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를 겪으며 서양 군대와 신식 무기의 위력을 절감해놓고도 앞선 과학기술을 배우고 근대적 제도 도입에 나서기는커녕 쇄국의 빗장을 꽁꽁 닫아걸었다.

1875년 일본이 운요호(雲揚號) 사건을 일으켜 이듬해 강화도조약 체결을 강요했을 때도 국익을 침해당하는 불평등 규정을 바로잡기보다는 고종의 예우와 청나라와의 관계에만 매달렸다. 한마디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캄캄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6년 뒤인 1882년 5월 서양 열강 가운데는 처음으로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맺는다. 이 역시 자발적인 의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일본의 조선 진출과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한 청나라(중국) 실권자 이홍장의 종용에 따른 것이었다.

그때까지 외국이라고는 청나라와 일본밖에 모르던 조선은 막막했다. 이홍장에게 여러 언어에 능통하고 국제적인 감각과 외교 실무 경험을 지닌 전문가를 요청하자 독일인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를 추천했다.

묄렌도르프는 청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된 조영하와 함께 1882년 12월 10일 제물포에 상륙해 그달 26일 한양 경복궁에서 고종을 알현했다. 이 자리에서 묄렌도르프는 안경을 벗고 공손히 절하며 조영하에게서 배워 달달 외운 한국어로 감사의 뜻을 표시했다.

이를 흡족하게 여긴 고종은 관모와 관복 등이 담긴 상자를 하사하고 종2품의 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에 임명했다. 지금으로 치면 외교부와 산업통상자원부를 합친 부처의 차관 격이었다. 귀화하지 않은 외국인이 우리나라에서 이처럼 고위 관료를 지낸 사례는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로도 없었다.

고종은 임오군란 때 숨진 민겸호의 수송동 집을 거처로 내줬다. 좌식 생활에 익숙지 않은 묄렌도르프는 내부를 서양식으로 꾸몄다. 한국식 이름은 목인덕(穆麟德)이었다. 흔히 목대감, 혹은 목참판으로 불렀다.

묄렌도르프는 1847년 프로이센왕국(1871년 독일제국에 합병)의 체데니크에서 태어났다. 할레대에서 동양어와 법률을 공부한 뒤 청나라로 이주해 해관(세관)에 취직했다. 베이징 주재 독일영사관 별정직원을 거쳐 톈진 주재 독일영사관에 영사대리로 발탁됐다. 여기서 이홍장과 친분을 다져 조선에 파견된 것이다.

이홍장은 묄렌도르프를 통해 조선 국정에 간섭하려고 했다. 비밀 계약을 맺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묄렌도르프는 중국이나 독일보다는 조선을 위해 헌신했다. 고종의 두터운 신임에 보답하기 위해서였는지, 열강의 먹잇감이 된 조선의 처지가 안타까워 돕고 싶었는지 알 수는 없다.

묄렌도르프는 외교와 통상은 물론 국정 전반에 걸쳐 활약했다. 조선이 일본과 관세 협정을 맺고 영국·독일·이탈리아·러시아와 차례로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할 때 조선의 입장을 적극 옹호했다. 해관 창설, 화폐 발행, 유리공장과 성냥공장 건립, 통역관 양성 등도 주도했다.

그러나 수구파와 지나치게 밀착하고 개화파와 대립해 정쟁을 격화시켰다는 비판도 받는다. 특히 재정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당오전(當五錢)을 발행한 것은 인플레이션을 초래해 갑신정변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묄렌도르프는 청나라와 일본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이려고 했다. 도쿄에서 일본 주재 러시아 공사 알렉산드르 다비도프와 밀약도 맺었다. 이를 눈치챈 청나라와 일본은 물론 미국·영국 등도 거세게 반발했다. 영국은 거문도를 점령해 무력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묄렌도르프에게 불만이 쌓여 있던 이홍장도 고종에게 압력을 넣었다.

견디다 못한 고종은 1885년 6월 묄렌도르프를 해임했다. 이홍장은 그를 텐진으로 소환하고 후임으로 미국인 오언 니커슨 데니를 파견했다. 묄렌도르프는 조선에 재입국하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닝보시 통계국장으로 일하다가 1901년 숨져 상하이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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