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토머스의 순교

조선에 처음 입국한 개신교 선교사는 귀츨라프였으나 신앙을 전파하는 데는 실패했다.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들어온 토머스는 순교의 피를 뿌리며 믿음의 씨앗도 함께 뿌렸다.

이희용 승인 2024.06.11 08:00 | 최종 수정 2024.06.11 09:46 의견 0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담은 기록화


서양인 천주교 선교사(모방 신부)가 이 땅에 처음 발을 딛기 3년 전인 1832년, 개신교 선교사가 조선에 입국했다. 독일 출신의 루터교 선교사 카를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귀츨라프였다.

네덜란드 선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그는 태국과 중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가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 선박 로드 에머스트호에 통역 요원으로 올랐다. 이 배의 주임무는 중국, 조선, 일본, 류큐(오키나와) 등의 지형을 탐사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7월 22일에는 안면도 남단의 고대도(지금의 충남 보령시 오천면)에 상륙해 통상과 선교를 요청했다가 거절당하자 20일 만에 일본으로 떠났다.

기항하는 도중 귀츨라프는 이민회 홍주목사(지금의 홍성군수에 해당), 김형수 수군우후(수군절도사를 보좌하는 무관) 등과 한문으로 필담을 나눴다. 주민들에게 한문 성경과 전도 문서 등을 나눠주고 감자 재배법과 포도주 제조법을 가르쳐주었다. 환자들에게 약을 처방하기도 했는데, 우리나라 사람에게 서양 의술을 베푼 최초의 기록이다.

그는 조선에 고유 문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한글 자모와 제자(製字) 원리 등을 최초로 서양에 소개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신총회는 2001년 고대도교회를 귀츨라프 기념교회로 선포한 데 이어 2005년 기념예배당을 건립하고 2층에 귀츨라프 기념실을 꾸며놓았다.

그러나 귀츨라프는 신도를 만들지는 못했다. 한국 개신교 역사가들은 귀츨라프보다 33년 뒤에 들어온 로버트 저메인 토머스를 최초의 선교사로 꼽는다. 영국 출신의 토머스 목사는 런던선교회 소속으로 중국에 파견됐다가 박해를 피해 온 조선 천주교도들을 만나보고 조선 선교에 뜻을 품었다.

1865년 9월 배를 타고 황해도 옹진군 창린도에 도착해 두 달 반 동안 머물며. 한문 성경을 나눠주고 한국어를 배웠다. 배를 타고 서울로 향했으나 풍랑을 만나 중국으로 되돌아갔다. 1866년 미국 무장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조선으로 향한다는 말을 듣고 통역관으로 합류했다.

셔먼호는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 인근에 정박한 뒤 망원경, 자명종, 유리그릇 등을 보여주며 교역을 제안했다가 거절당했다. 조선 관리는 인도적 차원에서 음식물과 땔감 등을 제공하고 즉각 되돌아갈 것을 요구했으나 셔먼호는 인근 지역을 탐사하며 선교 활동을 계속했다.

이 과정에서 충돌이 일어났고 셔먼호가 총포를 발사하자 격분한 관군과 주민들은 배를 불태웠다. 셔먼호 선원 대부분은 화약이 터져 폭사하거나 몸에 불이 붙은 채 물에 뛰어들었다가 익사했다. 토머스와 선원 한 명은 가까스로 탈출해 강변에 내렸다가 주민의 몽둥이와 칼에 맞아 숨졌다. 개신교에서는 그를 최초의 순교자로 보고 있다.

개신교 역사가들은 이때 흘린 순교의 피가 헛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토머스는 숨지기 직전까지도 주민들에게 한문 성경을 나눠주며 선교 열정을 불태웠다. 심지어 자신의 목에 칼을 내려치려는 퇴역 장교 박춘권에게도 성경을 건넸다. 박춘권은 “도대체 무슨 책이기에 죽어가면서도 내게 건네주려고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집으로 가져왔다가 읽어보고 예수를 믿게 됐다.

12살의 최치량은 배가 침몰하기 직전에 토머스가 밖으로 던진 성경을 주웠다가 금서라는 사실을 알고 겁이 나 평양의 영문주사(포졸) 박영식에게 바쳤다. 박영식은 종이 질이 좋은 것을 알고는 뜯어서 자기 집을 도배하는 데 썼다. 어느 날 물끄러미 벽을 바라보다가 성경 구절에 감화돼 예수를 영접하게 됐다.

어른이 된 최치량은 박영식의 집을 구입해 주막을 겸한 여관으로 꾸몄다. 1893년 미국 북장로회의 새뮤얼 오스틴 모펫 선교사가 이곳에 들러 쉬다가 벽에 붙어 있던 한문 성경을 발견했다. 최치량에게 사연을 듣고 토머스의 존재를 알게 됐다.

여관은 평양 최초의 예배당인 널다리골교회가 됐고 최치량은 초대 장로로 추대됐다. 널다리골교회는 장대현교회로 이름을 바꾼 뒤 평양을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리게 만든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의 구심점이 됐다.

제너럴 셔먼호는 국제법과 인도주의를 깡그리 무시한 전형적인 제국주의 침략이었다. 그럼에도 미국은 이를 빌미로 5년 뒤 신미양요라는 보복 공격을 가했고, 흥선대원군은 쇄국의 빗장을 더욱 굳게 걸어잠그며 망국의 길을 재촉했다.

황당하면서도 비극적인 사건 속에서 뿌려진 믿음의 씨앗이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려 열매를 맺은 것을 보면 역사의 순리나 신의 섭리는 상식적인 사고로는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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