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아침의 나라’ 저자 퍼시벌 로웰

조미수호통상조약에 따라 미국공사 푸트가 내한하자 고종은 답례로 보빙사를 파견했다. 보빙사 안내와 통역을 맡은 퍼시벌 로웰은 임무를 마친 뒤 조선을 3개월간 돌아보고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펴냈다.

이희용 승인 2024.06.25 08:00 의견 0

보빙사 일행을 찍은 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 인물이 퍼시벌 로웰로 추측된다

조선이 1882년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자 이듬해 4월 초대 조선 주재 미국공사 루시어스 푸트가 내한했다.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서양 열강의 외교관이었다. 고종은 답례로 미국에 보빙사(報聘使)를 파견한다. 이 역시 서양에 보낸 최초의 외교사절이었다.

보빙사는 정사 민영익, 부사 홍영식, 서기관 서광범, 무관 현흥택·최경석 등으로 구성됐고 고영철·변수·유길준이 수행원으로 따라나섰다. 이들은 1883년 7월 인천항을 떠나 일본에 들렀다. 주일 미국공사는 퍼시벌 로웰을 고용해 안내와 통역을 맡겼다.

1855년 미국 보스턴의 명문가에서 태어난 그는 하버드대를 졸업하고 동양의 매력에 이끌려 그해 5월부터 일본을 여행 중이었다. 한국어는 모르지만 일본어는 어느 정도 구사할 수 있어 영어에 능통한 일본인 미야오카 쓰네지로를 통역으로 대동했다.

9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보빙사 일행은 체스터 아서 미국 대통령이 머물고 있던 뉴욕 5번가의 호텔에서 신임장을 제정했다. 이들은 넙죽 엎드려 이마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한국식 큰절을 올려 아서 대통령을 당황하게 하기도 했다.

보빙사는 로웰의 안내에 따라 2개월간 뉴욕의 산업박람회장을 비롯해 병원, 소방서, 우체국, 전신회사, 제당공장 등을 둘러봤다. 고종은 로웰 덕분에 보빙사가 방미 외교와 산업 시찰 등 공식 일정을 성공적으로 마쳤다는 보고를 받자 감사의 뜻으로 그를 조선에 초청했다.

로웰은 보빙사와 함께 일본을 거쳐 12월 조선 땅을 밟았다. 안내와 통역을 맡은 윤치호와 함께 3개월간 한양의 주요 시설과 근교의 명승을 두루 돌아본 뒤 조선을 떠나 세계를 유람하다가 고향 보스턴으로 돌아갔다.

로웰은 조선의 정치·경제·문화·사회 등을 백과사전 형식으로 자세히 기록해 1885년 412쪽 분량의 책으로 펴냈다. 조선(朝鮮)의 한자 뜻을 담아 붙인 제목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Chosen, the Land of Morning Calm)’는 그 뒤로도 한국을 소개한 여러 저자가 따라 썼으며 지금까지도 한국을 상징하는 문구로 쓰이고 있다.

그는 조선을 “매혹적이면서도 이상하게 보인다”고 촌평하며 조선 사회의 지배 원리로 비개성적 특질, 가부장제, 여성의 지위 부재 등을 꼽았다. 책에는 고종의 어진(御眞)을 포함해 당시의 조선 풍물을 담은 사진 25장도 곁들였다.

로웰은 1884년 12월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미국 시사월간지 ‘애틀랜틱 먼슬리(Atlantic Monthly)’에 ‘조선의 쿠데타(A Korean Coup d'Etat)’란 제목으로 사건 배경과 주동자 면면을 소개했다.

그와 가깝게 지내던 홍영식의 죽음을 두고는 “일본인들의 배신으로 쿠데타가 실패하자 주모자들은 살길을 찾아 일본과 미국으로 도피했으나 혼자 남아서 청나라 군사들에게 체포돼 처형됐다. 용맹스럽고 충직했던 그는 대의를 포기하는 것은 비겁한 행위로 여기고 기꺼이 생명을 바쳤다”고 적었다.

로웰은 ‘서유견문’의 저자 유길준의 미국 유학을 주선하기도 했다. 보빙사 수행원인 그는 미국에 남아 생물학자 에드워드 모스의 개인지도를 받다가 더머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자 조선 국비 유학생 1호였다.

로웰은 천문학에도 관심이 많아 1894년 로웰천문대를 세웠으며 자신이 '행성X'라고 명명한 9번째 행성을 찾는 데 몰두하다 뜻을 못 이루고 1916년 세상을 떠났다. 14년 뒤 로웰천문대의 조수 클라이드 톰보가 9번째 행성을 발견해 명왕성(Pluto)으로 이름 지었다. 명왕성의 약칭 ‘PL’은 ‘Pluto(저승의 신)’의 앞 두 글자이자 퍼시벌 로웰의 머리글자를 딴 것이다. 그러나 명왕성은 2006년 국제천문연맹의 기준 변경으로 지구 행성에서 퇴출됐다.

1668년 ‘하멜 표류기’ 이후 처음으로 한국을 서양에 알린 책은 1882년 미국인 윌리엄 그리피스의 ‘은둔국 코리아(Corea, the Hermit Nation)’다. 그는 한국에 와본 경험도 없이 일본에서 주변 사람의 이야기만 듣고 책을 썼다. 로웰은 직접 조선 땅을 둘러보고 고위 관료들과 대화를 나눈 경험을 살려 비교적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기술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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