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뛰어넘은 이순신·진린 후손들의 우정

한국의 진조 후손들은 진린을 시조로 모시고 그의 고향을 따서 ‘광동 진씨’라고 부른다.

이희용 승인 2024.04.23 08:00 | 최종 수정 2024.04.26 09:43 의견 0
전남 해남군 산이면 덕송리 황조마을의 진린 사당 황조별묘.
한중 우의를 기념하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나라는 조선의 요청을 받아들여 4차에 걸쳐 30만 명에 가까운 대군을 파병했다. 전쟁의 불길이 자신의 영토로 번지는 걸 막으려는 계산이 앞선 까닭이었으나 바람 앞의 등불 같던 조선으로서는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까닭에 명나라 원군은 왜군과의 정면대결을 꺼리고 휴전 협상에 매달렸으며, 조선군과 백성에게 거드름을 피우고 횡포를 부렸다. 수군 5천 명을 이끌고 정유재란에 참전한 진린 제독도 처음에는 다르지 않았다.

선조실록이나 징비록 등 사료에는 그를 부정적으로 묘사한 대목이 자주 등장한다. 역사소설이나 TV사극에서도 교만하고 탐욕스러운 악인으로 그려지는 게 보통이었다. 최근 개봉한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에서도 초반에는 이순신을 고압적으로 대하는가 하면 왜군 뇌물을 받고 퇴로를 열어주려고 한다.

그러나 이순신의 능력과 인품에 감화된 뒤에는 태도를 바꿔 왜군과의 결전을 불사하고 이순신과 흉금을 터놓는 사이가 된다. 실제로도 진린은 이순신의 전공을 명나라 황제에게 보고해 깃발, 도장, 병풍 등 8가지 하사품을 내리도록 했다. 이순신이 전사하자 통곡하며 추모시를 짓기도 했다.

둘의 우정은 후손에게도 이어졌다. 중국에 개선한 진린은 벼슬이 계속 높아져 광동백(廣東伯)에 봉해졌다. 아버지를 따라 정유재란에 참전한 아들 진구경은 여진족(청나라)과 싸우다 숨졌다. 손자 진조(진영소)는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자 1644년 조선으로 망명했다. 할아버지가 주둔하던 전남 완도군 고금도에서 경주 이씨와 결혼해 살다가 전남 해남군으로 이사했다.

한국의 진조 후손들은 진린을 시조로 모시고 그의 고향을 따서 ‘광동 진씨’라고 부른다. 전남 해남군 산이면 덕송리 황조마을이 최대 집성촌이다. ‘명나라 황제의 조정에서 큰 벼슬을 한 충신의 후예가 산다’는 뜻이다. 전국의 씨족 3천여 명 가운데 56가구가 거주한다.

황조마을에는 중국의 고향을 그리는 뜻에서 서향으로 지은 집이 많다. 진린 초상을 모시고 아들, 손자, 증손자(진석문)까지 4대 선조의 제사를 받드는 사당 황조별묘(皇朝別廟)도 건립했다. 앞뜰에는 한중 우의를 기리는 표석도 세웠다.

2014년 방한한 중국의 시진핑 주석은 서울대에서 “명나라 등자룡과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에서 함께 전사했으며, 명나라 진린 장군의 후손은 오늘까지도 한국에 살고 있습니다”라고 강연했다. 주한 중국대사 추궈홍과 싱하이밍도 각각 2015년과 2020년 황조마을을 찾았다.

광동 진씨 종친회는 1994년 광둥성(廣東省) 웡위안현(翁源縣)을 찾아 진린 후손들과 만난 것을 시작으로 해마다 양국을 교환 방문해 우의를 다지고 있다. 이순신 후손인 덕수 이씨 종친회와도 교분을 이어가고 있다. 해남군은 웡위안현과 1999년 자매결연한 데 이어 2023년 8월 국제우호도시 협약을 체결해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하고 있다.

완도군도 진린이 묘당도에 세웠던 관왕묘(關王廟) 복원을 추진하고 이순신·진린 추념식을 개최하는 등 현양 사업에 나서고 있다. 명나라 군대는 임진왜란 때 주둔하는 곳마다 삼국시대 촉한의 무장 관우를 모시는 관왕묘를 건립했으나 대부분 없어졌다. 남은 곳 가운데서는 서울의 동관왕묘(동묘)가 가장 유명하다.

진린은 본국으로 철수할 때 남은 재물을 섬 주민들에게 주며 관왕묘를 잘 지켜 달라고 당부했다. 주민들도 당부를 어기지 않았다. 그러나 일제가 파괴해 옥천사라는 이름의 사찰이 됐다가 해방 후 이순신을 모시는 사당 충무사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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