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벨테브레이와 일본인 애덤스의 차이

1627년(인조 5년) 네덜란드 더레이프 태생의 얀 야너스 벨테브레이가 제주도에 발을 디뎠다. 최초의 정착(귀화) 서양인 박연(朴淵)이다.

이희용 승인 2024.05.14 08:00 의견 0
서울 광진구 어린이대공원에 있는 벨테브레이(박연) 동상.
똑같은 작품이 벨테브레이 고향인 네덜란드 더레이프에도 세워져 있다.

우리나라가 외국과 교류한 역사는 고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그 대상이 중동을 넘어 유럽으로 넓어진 것은 임진왜란(1592~1599) 전후의 일이다.

1582년 마리이(馬里伊)란 이름의 국적 불명 서양인이 중국인 일행과 함께 조선에 표착했다가 중국으로 돌아갔다. 임진왜란 때는 스페인 출신의 천주교 신부가 왜군을 따라 조선 땅을 밟는가 하면 포르투갈 국적의 모잠비크 출신 흑인 4명이 명나라 원군 소속으로 참전하기도 했다.

1604년에도 포르투갈인 주앙 멘데스가 중국에서 일본으로 배를 타고 가던 도중 풍랑을 만나 경남 통영에 상륙했다가 중국으로 송환됐다. 연려실기술 등에는 이름이 지완면제수(之緩面第愁)로 기록돼 있다. 통영시는 2006년 산양읍 삼덕리 삼덕항에 ‘최초의 서양 도래인 주앙 멘데스’라고 새긴 기념비를 세웠다.

그로부터 23년 뒤인 1627년(인조 5년) 네덜란드 더레이프 태생의 얀 야너스 벨테브레이가 제주도에 발을 디뎠다. 최초의 정착(귀화) 서양인 박연(朴淵)이다. 네덜란드 상관(商館)이 있는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던 중 표류했다. 땔감과 식수를 구하러 동료 두 명과 함께 상륙했다가 조선 관헌에게 붙잡혀 한양으로 이송됐다.

당시 조선에서는 접경국 출신 표류자는 본국으로 송환하고 그밖의 표류자는 중국에 보내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정묘호란이 발발한 그해가 명·청 교체기여서 명나라로도 후금(청나라)으로도 보내기 곤란했다. 당시 기독교를 배척하던 일본은 이들이 크리스천이라는 이유로 인도를 거부했다.

조선 조정은 이들의 군사적 재능에 주목했다. 명나라에서 수입한 홍이포의 제작법과 조총 쏘는 법을 지도하는 한편 훈련대장 구인후의 지휘를 받아 투항한 일본인과 포로가 된 청나라 군인을 감시했다. 19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출전해 박연의 동료들은 전사했다.

박연은 1648년(인조 26년) 무과에 응시해 급제했다. 이듬해 등극한 효종은 북벌 준비를 위한 화포 개선에 활용하려고 그를 중용했다. 박연은 조선인 여성과도 결혼해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두었다. 자녀의 생김새는 네덜란드인과 조선인 얼굴이 반반 섞여 있어 보는 이들이 신기해했다는 기록이 있다.

박연은 하멜표류기에도 등장한다. 하멜 일행의 통역을 맡은 것이다. 26년 만에 고향 사람을 만난 그는 옷깃이 흠뻑 젖을 정도로 눈물을 펑펑 쏟았다고 한다. 조선 관리가 하멜에게 갓 쓰고 한복을 입은 박연을 가리키며 어느 나라 사람인지 물었다. 하멜이 “우리 네덜란드 사람이 틀림없다”고 대답하자 관리는 “틀렸다. 이자는 조선 사람이다”라고 말하며 크게 웃었다.

1991년에는 네덜란드에 사는 박연 후손(헹크 벨테브레이)이 찾아와 한국에 사는 후손을 수소문했으나 못 찾고 돌아갔다. 네덜란드 라이프시에는 600여 명의 박연 후손이 주로 어업에 종사하며 산다고 한다.

네덜란드 조각가 엘리 발튀스는 1988년 박연의 고향 더레이프에 박연 동상을 세웠다. 훈련도감 군관 제복 차림인데 가슴에는 삼성카메라도 보인다. 1991년 복제품을 기증해 서울 광진구의 어린이대공원에 설치했다.

박연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 일본으로 귀화한 서양인도 있었다. 영국 해군이던 윌리엄 애덤스는 1600년 일본에 상륙했다. 서양식 배를 만든 공로로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총애를 얻어 사무라이가 됐다. 일본식 이름 미우라 안진(三浦按針)으로 불리며 250석의 영지와 농노를 받고 일본 여인과 결혼했다.

둘이 비슷한 행로를 걷기는 했으나 박연이 무기 제작에만 매달린 것과 달리 애덤스는 네덜란드를 상대로 한 외교와 영국과의 무역을 주선하는가 하면 지구의를 제작하고 북아메리카 북쪽을 가로지르는 북서항로 개척을 건의하기도 했다.

이처럼 두 나라 최초 귀화 서양인들의 역할이 달랐던 것은 반도국가 조선과 해양국가 일본의 지정학적 조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 작은 차이가 훗날 조선과 일본의 명운을 가르는 단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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