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용이 아내의 불륜을 용서한 까닭

이희용 승인 2024.02.20 08:00 의견 0



고구려의 온달 장군과 함께 우리나라 고대사에서 서역인으로 추정되는 또 한 명의 인물은 9세기 통일신라 헌강왕 때의 처용이다.

삼국유사에는 ‘동해 용왕의 아들’로 기록해놓았고, 삼국사기는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중략) 생김새가 해괴하고 옷차림과 두건이 괴상하였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왕으로부터 벼슬을 받고 신라 여인과 결혼까지 한 처용은 향가 ‘처용가’에 나오듯이 역신(疫神·질병을 옮기는 신)이 아내와 동침하는 장면을 보고도 분노하지 않고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른다. 이에 감복한 역신은 용서를 빌며 “앞으로 당신 집에는 절대 들어가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그 뒤로 백성들은 처용의 얼굴 그림을 대문에 붙여 병을 피하고 궁중과 관아에서는 처용무(처용 탈을 쓰고 추는 춤)로 나쁜 귀신을 물리쳤다.

역사학자들은 처용이 서역인, 그 가운데서도 페르시아나 아라비아 상인일 것으로 추정한다. 용왕의 아들이라는 기록은 바다 건너 이주해왔다는 사실을 방증하고, 생김새가 해괴하다는 기록이나 얼굴 그림을 역신 쫓는 부적으로 썼다는 전설은 동아시아인들과는 용모가 확연하게 달랐음을 뜻한다. 조선 성종 때의 ‘악학궤범’을 보면 처용 탈은 생김새가 험상궂고 이목구비가 뚜렷하며 낯빛은 붉은 특징을 지닌다.

아내의 불륜을 스스로 응징하지 않은 것도 언어 소통이 원활하지 않고 신분이 불안정한 이방인인 탓으로 풀이한다. 이러한 사정은 현대에도 마찬가지여서 이주민들은 범죄나 불법행위에 연루되기를 매우 꺼린다. 사법당국의 보호를 받기 어려운 데다 체류자격이 박탈돼 추방될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서역 쪽의 기록에도 우리나라와의 교류 사실을 추정할 만한 단서가 있다. 2009년 영국 국립도서관에서 발견된 대서사시 ‘쿠쉬나메(Kushnameh)’ 필사본에는 7세기 중엽 이슬람제국에 정복당한 사산조 페르시아제국의 마지막 왕자 아비틴이 중국을 거쳐 바실라로 망명한다는 대목이 등장한다.

중국이 바실라를 침공하자 아비틴은 바실라·페르시아 연합군을 이끌고 대승을 거둔다. 개선한 뒤 아내로 맞은 바실라 공주 프라랑과 페르시아로 돌아가다가 중국의 공격을 받아 전사하고 프라랑은 배에서 왕자 파리둔을 낳는다. 훗날 파리둔은 바실라 군대를 이끌고 중국 수도를 점령해 복수에 성공한다.

입으로 전해 내려온 영웅담을 신화처럼 꾸민 쿠쉬나메는 인명과 지명이 사료와 일치하지 않아 역사적 고증이 쉽지 않다. 사서에는 651년 사산조 페르시아가 멸망하고 마지막 왕자 피루즈가 중국 당나라로 망명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이란 학자들과 함께 쿠쉬나메를 번역한 이희수 당시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페르시아 멸망 이듬해 이슬람제국이 당나라와 국교를 맺자 송환될 위기에 놓인 피루즈가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는데, 그의 새 망명지가 신라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의 추정에 따르면 아비틴은 피루즈, 프라랑은 무열왕의 셋째딸이다. 파리둔이 바실라군과 중국 군대를 물리친 것은 삼국통일 후 대당(對唐)전쟁의 승리를 일컫는 것이다.

2016년 5월 이란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은 “페르시아 왕자와 신라 공주가 사랑을 나눈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두 나라가 만들어낼 수 있는 좋은 소재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의 언급이 있기 전부터 방송다큐멘터리와 동화 등으로 소개됐으며 무용극 '바실라', 연극 ‘쿠쉬나메-끝나지 않은 이야기’, 소설 ‘테헤란로를 걷는 신라공주’, 만화책 '처용항의 페르시아 왕자' 등도 속속 선보이고 있다.

신라와 페르시아가 활발하게 교류했음을 입증하는 유물과 사료는 숱하게 발견된다. 신라 고분에서 쏟아져나온 유리 제품들은 로마형과 페르시아형으로 나뉜다. 경북 칠곡군 송림사 5층 전탑에서 나온 7세기 초 사리그릇에는 사산조 페르시아에서 유행하던 고리무늬가 장식돼 있다. 황남대총 북묘의 은제 잔, 계림로에서 출토된 황금보검, 아라베스크 무늬의 당초문 등도 유력한 증거물이다. 원성왕릉(괘릉)이나 흥덕왕릉의 무인석상은 턱수염이 덥수룩하고 눈이 부리부리하고 코가 높아 오늘날 중동 사람과 많이 닮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843년 신라 흥덕왕은 에메랄드를 박은 페르시아산 빗과 관(冠), 서역계 모직물, 동남아산 공작꼬리와 물총새 털 등을 쓰지 말라는 교시를 내렸다. 당시 귀족들이 얼마나 해외 명품에 열광했으면 왕이 이런 엄명을 내려야 했을까. 물자가 이처럼 많이 들어왔다면 사람 또한 많이 들어왔을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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