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이 그렇게 높을 수 있는 까닭

이희용 승인 2024.01.30 08:00 의견 1


중국은 기원전 8세기에서 3세기에 이르는 500여 년 동안 여러 나라로 갈려 전쟁을 계속했다.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춘추전국시대라고 일컫는다. 나중에는 전국칠웅이 각축을 벌였고 최후의 승리자는 진나라였다.

진나라의 마지막 왕을 도와 최초의 황제로 만든 인물이 승상 이사다. 그는 법치주의에 입각해 법령과 제도를 정비하고 도량형을 통일해 부국강병을 이뤘다.

이사는 진나라의 숙적 초나라 태생이었다. 진나라에서 객경(客卿)으로 지내던 중 간첩 사건이 일어났다. 한나라에서 온 정국이 관개 시설을 만든다는 명목으로 진나라의 국력을 소모시키려는 음모를 꾸몄다가 발각된 것이다.

왕족과 토착 귀족들은 일제히 타국 출신 벼슬아치들을 모두 쫓아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진왕은 진나라 사람이 아닌 관원을 모두 추방하는 이른바 축객령(逐客令)을 내렸다.

이사는 진나라 도읍 함양을 떠나며 다음과 같은 내용의 상주서를 바쳤다. "태산은 한 줌의 흙도 마다하지 않아 그렇게 클 수 있었고, 큰 강과 바다는 작은 물줄기일지언정 가리지 않았기에 그렇게 깊을 수 있었다“[泰山不辭土壤 故能成其大, 河海不擇細流 故能就其深]

이를 읽고 난 진왕은 축객령을 철회하고 이사를 불러들여 승상으로 임명했다. 사기 이사열전에 나오는 유명한 일화다.

춘추전국시대와 비슷한 시기에 중동 일대를 호령하던 세력은 페르시아였다. 서양 중심으로 세계사를 배운 우리는 그리스 연합군에 패배하고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당한 역사만 기억하고 있지만, 고대 페르시아제국이 누린 영광의 시대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찬란했고 오래 지속됐다.

기원전 539년 바빌로니아를 누르고 패권을 차지한 페르시아 황제 키루스 2세는 키루스 원통(圓筒)이라는 인류 최초의 인권선언을 발표했다. 다른 민족의 전통과 종교를 존중하고 노예제를 금지하겠다는 혁신적인 내용이었다. 이 선언은 2세기 넘도록 방대한 제국을 유지한 토대가 됐다.

인도 마가다왕국의 아소카왕은 수많은 불탑을 세우고 해외에 불교를 전파하면서도 다른 종교를 폭넓게 인정해 마우리아왕조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기원전 3세기에 세워진 아소카 석주(石柱)에는 종교 포용과 교류를 권장하고 희생 제물을 금지하는 칙령이 새겨져 있다.

기원전 1세기 고대 로마의 카이사르는 장기복무한 속주민 군인에게도 제대하면 시민권을 부여해 제국의 기초를 닦았다. 교사와 의사 등 지식인과 기능인에게는 신청 즉시 시민권을 주어 인재를 불러 모았다. 카이사르 사후에도 이 정책은 계승돼 140여 년 만에 속주 출신의 트라야누스 황제가 나올 수 있었다.

7~9세기 당나라는 중국의 최전성기였다. 도읍 장안에는 인근 나라는 물론 인도와 아라비아의 상인이 북적거렸고 각국 유학생도 넘쳐났다. 당나라는 과거제에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빈공과를 두어 관리로 등용했다.

신라인 합격자 가운데 대표적 인물이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으로 잘 알려진 최치원이다. 그는 당대 최강국인 중국에서 실력을 인정받았는데도 정작 모국에서는 대접받지 못했다.

진골이 아닌 6두품이란 이유로 귀국 후 고위직 진출이 막혔을 뿐 아니라 894년 진성여왕에게 올린 개혁안 시무10여조(時務十餘條)도 채택되지 않았다. 그 뒤로 신라가 어떤 운명을 걸었는지는 우리가 잘 알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개방과 포용은 발전의 도약대이고 폐쇄와 배타는 몰락의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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