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교육의 씨앗 뿌린 아펜젤러
아펜젤러는 근대교육의 효시인 배재학당과 감리회 모교회인 정동제일교회를 세웠다. 선교 여행 중 불의의 사고로 숨졌으나 자녀들은 아버지 뜻을 이어 교육사업에 헌신했다.
이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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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3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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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감리회가 파견한 선교사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한국명 아편설라·亞篇薛羅)는 미국 북장로회 소속의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와 함께 1885년 4월 5일 제물포항에 발을 디뎠다.
아펜젤러는 1858년 2월 6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태생이다. 프랭클린 마셜대를 거쳐 뉴저지 메디슨의 드류대 신학부를 졸업했다. 처음에는 일본 선교를 준비하다가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친구가 중병에 걸려 못 가게 되자 대신 가기로 결심했다.
그는 임신한 아내와 동행했다. 그러나 갑신정변으로 서울의 치안이 불안하다는 말을 듣고 아내를 일본으로 데려다준 뒤 5월 3일 다시 입항했다. 아내는 6월 20일 제물포항에 내렸으나 남편과 함께 한동안 인천 중구 내동의 초가에 머물렀다. 일본에서 화물로 부친 오르간이 7월 7일 도착하자 이곳에서 예배를 드렸다. 훗날 이 자리에 내리교회가 들어섰다.
아펜젤러 부부는 7월 29일 서울에 입성했다. 그해 11월 9일 딸 앨리스를 낳았는데, 우리나라에서 태어난 최초의 서양인 부부 아기로 알려져 있다.
아펜젤러는 1885년 8월 3일 자신의 집에서 이겸리와 고영필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교육사업을 시작했다. 우리나라 근대교육의 출발이다. 고종은 이듬해 6월 8일 ‘배재학당(培材學堂)’이란 교명과 편액을 내렸다. 배재는 배양영재(培養英才·뛰어난 인재를 기름)의 줄임말이다.
1886년 4월 25일 부활절에는 조선 주재 일본공사관 직원에게 첫 세례를 주었다. 아펜젤러는 정동의 조그만 집 한 채를 사들여 ‘벧엘예배당’으로 꾸민 뒤 1887년 10월 9일 예배를 올렸다. 한국 감리회의 모교회인 정동제일교회의 시작이다.
아펜젤러는 전도 여행에 열심이었다. 1887년 4월의 1차 전도 여행을 시작으로 1888년 한 해 내내 선교 사역에 전념했다. 1902년 6월 11일에도 전남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번역자회의에 참석하려고 배를 타고 제물포항을 떠났다가 군산 앞바다에서 마주 오는 배와 충돌해 실종됐다.
이로써 17년 남짓한 그의 한국 선교와 교육사업도 막을 내렸다. 하지만 그의 자녀들이 뜻을 이어받아 빈자리를 채웠다.
딸 앨리스 레베카 아펜젤러는 미국에서 중고교와 대학을 마치고 다시 내한해 1922년 이화학당 교장으로 부임했다. 이화학당과 배재학당은 같은 감리교 소속이었다. 1925년 대학과를 전문학교로 승격시키고 신촌에 학교 터를 마련해 1935년 전문학교와 보육학교를 옮겼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미국으로 갔다가 광복 후 내한, 이화여대 명예총장을 맡았다.
아들 헨리 도지 아펜젤러는 배재학당 교장으로 헌신했다. “우리 배재학당 배재학당 노래합시다”로 시작되는 교가는 그가 자신의 모교인 프린스턴대 응원가를 개사해 만든 것이다. 6·25가 터지자 기독교세계봉사회 한국 책임자를 맡아 피란민과 고아를 대상으로 구제사업을 펼쳤다. 배재중고교 이사장과 서울예고 초대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서울 마포구 합정동의 양화진 외국인묘지에는 아펜젤러 가족 묘역이 있다. 아버지 아펜젤러의 시신은 찾지 못해 빈 무덤(가묘)이다. 앨리스의 묘비에는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라고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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