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불쌍히 여기는 사랑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요? 제아무리 십자가를 드높이 치켜들고 목이 터질 만큼 예수를 부르짖어도 불쌍한 사람을 돕지 않으면 참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독일계 미국 간호선교사 엘리자베스 요한나 셰핑(한국명 서서평·徐舒平)은 1928년 5월 평양에서 열린 조선간호부회 총회에서 이렇게 호소했다. 연설의 한 대목만 들어도 ‘조선의 마더 테리사’, ‘조선의 작은 예수’ 등으로 불릴 만하다.
셰핑은 1880년 9월 26일 독일 중부 도시 비스바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가 한 살 때 숨졌다고 하는데, 셰핑이 사생아였다는 설도 있다. 3살 때 어머니가 그를 친정어머니한테 맡기고 미국에 이민했다. 9살 때 외할머니가 사망하자 주소 적힌 쪽지를 들고 어머니를 찾아 미국으로 건너갔다.
다행히 어머니를 만나 뉴욕에서 가톨릭계 중고교를 거쳐 성마르코병원 간호전문학교를 다녔다. 졸업을 앞두고 뉴욕시립병원에서 실습하던 중 동료의 권유로 천주교에서 개신교로 개종했다. 이 일로 인해 어머니에게 또다시 버림받아 집에서 쫓겨났다.
낮엔 간호사로 일하고 밤엔 신학교를 다닌 뒤 유대인 결핵요양소와 이탈리아 이민자수용소 등에서 봉사했다. 조선에는 환자가 길에 버려질 정도라는 말을 듣고 미국 남장로회 해외선교부에 들어가 1912년 2월 20일 조선 땅을 밟았다.
처음 부임한 곳은 광주광역시 광주기독병원의 모태가 된 광주제중원이었다. 2대 원장 로버트 윌슨(한국명 우월순)을 도와 환자들을 돌보며 북문안교회(현 광주제일교회) 초대 장로로 이곳에서 봉사하던 최흥종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군산의 구암예수병원과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도 일했다.
1919년 3·1운동 때는 서울에 있었다. 부상자를 돕고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최흥종을 뒷바라지하다가 일제가 서울 활동을 금지해 다시 광주로 내려갔다. 윌슨 원장이 광주제중원에 차린 한센병진료소와 전남 여수 애양원에서 환자들을 보살폈다.
한센병 환자의 인권 보호와 자활 기반 마련에도 앞장섰다. 목사가 된 최흥종과 함께 한센병 환자 강제 불임수술에 반대하고 이들에게 삶의 터전을 마련해줄 것을 요구했다. 1933년에는 환자 500여 명을 이끌고 서울의 조선총독부로 행진을 벌여 이듬해 전남 고흥군 소록도에 대규모 요양시설과 자활시설이 들어서도록 했다.
셰핑은 1923년 4월 대한간호협회 전신인 조선간호부회를 결성해 10년간 회장을 맡아 ‘한국 간호사의 어머니’로 불린다. ‘간호교과서’, ‘실용간호학’, ‘간호요강’, ‘간이위생법’ 등의 교재를 펴내고 ‘간호사업사’를 비롯한 외국 서적도 우리말로 번역했다. 그가 조선간호부회를 국제간호협회에 가입시키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셰핑은 1921년 미국 남장로회 해외선교부에 보낸 편지에서 “조선에서 500명이 넘는 여성을 만났는데, 제대로 이름 가진 이는 10명도 안 됐고 개똥엄나나 큰년이라고 불린다”면서 “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한글을 깨우쳐주는 것이 큰 기쁨”이라고 썼다.
1922년 6월 2일 전도부인양성학교를 개교한 데 이어 1926년 미국 친구 로이스 닐의 도움을 얻어 광주 양림동에 건물을 짓고 후원자 이름을 따 이일(李一)학교로 명명했다. 이일학교는 1923년 여성성경학교로 출발한 전주의 한예정성경학교와 1961년 합병하며 두 학교 이름을 한 글자씩 따서 한일장신대가 됐다.
광주 양림산에 뽕나무밭을 가꾸고 여성 자립을 위한 양잠, 직조, 자수 기술 등을 가르치는가 하면 이를 통해 만든 손수건과 탁자보 등을 미국에 팔아 이일학교 학생들의 학비로 썼다. 부인조력회 등 여성단체를 결성해 여성운동가들을 길러내고 인신매매와 축첩 반대, 공창 폐지 운동도 펼쳤다.
셰핑은 평생 독신으로 지내며 불쌍한 아이를 보면 집으로 데려와 씻기고 먹였다. 버려진 아이 14명을 양자로 삼았는데, 한센병 환자도 한 명 있었다. 과부나 소박맞은 여인도 38명이나 집으로 데려와 함께 지냈다. 늘 흰 저고리 검정 치마에 남성용 고무신 차림이었고 보리밥과 된장국을 좋아했다.
1934년 6월 28일 만성흡수불량증으로 세상을 떠나며 시신까지 의학실습용으로 기증했다. 남긴 재산은 동전 7닢, 옥수숫가루 두 홉, 담요 반 장뿐이었다. 나머지 반 장은 더 가난한 이에게 찢어서 주었다고 한다. 침대 머리맡에는 그의 좌우명인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NOT SUCCESS, BUT SERVICE)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장례식은 광주 최초의 시민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이일학교 학생들이 운구하고 소복 차림 여인들이 뒤따랐다. 한센병 환자와 걸인들은 “어머니”를 외치며 목놓아 울었다. 동아일보는 사설에 “백만장자 못지않은 집에 편히 앉아서 하인을 두고 자동차를 몰고 다니는 어떤 선교사들의 귀에 셰핑의 일생은 어떻게 울릴까?”라고 꼬집었다. 미국 남장로회 해외선교부는 1930년대 전 세계에 파송한 선교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선교사 7인’을 선정하며 한국에서 활동한 선교사로는 유일하게 서서평을 꼽았다.
셰핑의 조선 사역 100주년인 2012년과 타계 80주년인 2014년에 그의 일대기를 담은 전기, 뮤지컬, 연극, 학술세미나 등이 선보였고 2017년에는 영화 ‘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도 개봉했다. 올해는 그의 90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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