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은 왜 더 불안해할까?

이종관 승인 2024.03.17 20:36 | 최종 수정 2024.03.18 17:21 의견 0


20년이 훨씬 지난 글이지만 지금의 우리 상황에서도 적합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이종관(성균관대 철학과)명예교수가 1999. 1. 6. 중앙일보에 올린 글을 저희 미디어가 추구하는 바와 동일하다고 판단, 다시 함께 읽어보시지요 (* 출처 : https://www.joongang.co.kr/article/3741150#home).


현대인, 그들은 불안하다.

컬트무비에서 엽기적 광경을 훔쳐보며 축구장에서 광란의 폭력성을 분출한다. 어디론가 쉴 사이 없이 전화를 걸고 받는다. 뿐만 아니라 웃음에 과도하게 집착하며 모든 것을 희화화하고, 비아그라를 복용하며 오르가슴을 끝없이 지속시키려 한다. 혼자 있으면, 웃지 않으면, 희열의 신음소리가 없으면 불안이 엄습해올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일까. 또 현대인들이 즐기는 음악은 잡음과 소음이 혼합된 파열음이다. 그 파열음만큼이나 균열이 간 듯 안정감을 상실한 영혼의 뒤틀림. 어쩌면 현대인의 영혼은 프란시스 베이컨의 일그러진 인물화만큼 잠식되어 있을지 모른다.

천재감독 파스빈더는 영화를 통해서 말했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고. 그런데 대체 이 불안은 어디서 오는가.
세기말의 혼돈, 그 상투적 이유 때문일까. 불안은 하이데거식으로 말하면 인간 존재의 깊은 심연에 드리워져 있는 근본적 분위기다. 인간 자신의 존재가 어느 순간 한줌 존재의 무게도 지니지 못한 채 흩어져 버릴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 허무한 하데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지하의 신) 의 땅으로 추락할 순간이 예고없이 닥쳐오며 그 순간을 어느 누구도 대신 떠맡을 수 없다는 사실. 더구나 이러한 사실들을 모를 수 없다는 앎의 불행. 바로 이것이 원초적 불안이라는 존재의 멜랑콜리가 인간 내면에 숙명처럼 스며든 이유일 것이다. 때문에 불안은 잘라도 어느새 고개를 다시 치켜드는 메두사의 머리처럼 인간을 끈질기게 두려움 속으로 몰아넣는다.

불안과의 대결, 그것은 인류의 역사에서 사건으로 기록되지 않은 가장 처절한 싸움이었다.

예컨대, 고대 그리스인들은 불안에 대항하기 위해 용기를 과장하였고, 그리스의 영웅전은 불안에 떠는 삶의 비겁한 모습을 죽음과 결연히 싸우는 비장미로 장식하여 불안을 떨쳐내려 한 신화이기도 하다. 또한 중세는 불안에 빠진 인간을 전능한 하느님이 동정해주기를 영혼 바쳐 갈구함으로써 불안으로부터 도피하려 하였다. 그리고 오늘날 인간은 삶의 불안 요인들을 장악하고 삶에 희열을 제공하는 과학기술을 통하여 그것을 추방하려 한다.

세번째 밀레니엄으로 떠나는 현대인. 이제 역사는 그들에게 멀티미디어 정보통신 기술을 선사했다.

섬세한 상황제어 능력을 과시하며 세상을 매혹적인 시각적 이미지와 가상현실로 채색하는 이 현란한 테크놀로지는 실로 그 존재의 우울을 마비시킬 수 있는 구원의 기술인 것처럼 보인다. 더구나 그것은 폭력적이고 위험투성이인 실재 현실로부터 환상과 희열로 가득 찬 가상현실로 우리의 삶을 탈출시키는 단계로 발전하고 있는 중이다.
이 과정이 완숙되면 아마도 죽음에 대한 불안으로 상처받은 우리 영혼은 애무 받으며 환각 속에서 불안한 현실을 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왜 현대인은 그토록 불안해하는가.

그들의 영혼이 잠식될 수밖에 없었던 불안의 원천은 무엇인가.
매우 역설적이게도, 불안을 장악하고 마비시키는 그 최첨단 기술에 오히려 그 불안을 증폭시키는 원인이 잠복하고 있다. 우선 정보화 기술은 그 특유의 불투명성을 조장한다. 정보화 시대에는 천문학적 양의 정보가 생산되고 저장된다. 더구나 그 천문학적 정보의 파장 효과는 이제 그 양과 속도에 있어서 우리 삶의 대응 속도와 예측 능력을 엄청난 격차로 추월해버렸다. 현실은 이제 급격한 변동 속에 그 위험을 제어할 수 없는 상황에 빠져들면서 불안감이 증폭되는 것이다. 또한, 정보화는 우리의 삶을 허무주의 속으로 방치하고 있다.

정보를 광속으로 유통시키는 정보통신 기술의 시장 침입으로 시장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변하고 있다. 이 변화의 물결은 전 삶의 영역이 구석구석 전지구적 규모로 시장화되는 과정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결과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상품으로서만 가치를 지니며, 그 가치는 팔릴 때만 결정된다. 이러한 환경에서 존재자의 지속적 가치, 존재와 삶의 본질은 불필요하며 또 부재해야만 한다. 전지구적으로 급변하는 시장 환경에 처한 삶이 근거할 수 있는 진리를 찾는 것은 허망하고 비효율적 행위다.
그리고 무모한 짓이다.
그것은 변화에 순발력 있게 대응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현실의 구조를 외면하는 도태과정일 뿐이다. 이제 가치는 없고 가격만이 있을 뿐이다. 또 진리는 없고 순간적으로 검색 가능한 정보만 있을 뿐이다.

현대는 삶으로부터 깊이.가치' 그리고 진리를 거세해 내는 허무주의로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지식이나 예술을 순발력 있게 정보화하고 상품화하는 자들. 그리고 그것을 시장에 신속하게 유통시켜 시장확대에 기여하는 정보 유통 기술을 개발하는 자들. 또 원초적 본능을 충혈시킬 수 있는 자들. 바로 그들에게 역사는 운명을 걸었다. 이처럼 오늘날 삶의 의미와 방향이 사회적 담론의 주제로서 가치를 상실했다면, 그리하여 결국 삶이 어떠한 진리와 근원에 대해서도 사색하지 않는 허무주의로 방치되고 있다면, 삶의 심연에 드리워진 원초적 허무의 불안은 방향상실의 좌절 속에서 더욱 더 짙어지고 그 고통의 비명은 한층 더 증폭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보통신 기술이 만들어내는 가상공간 속에서 자아는 해체의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는 사실이 다가올 시대를 더욱 불안하게 한다.

실제 현실에서 지금 여기에 있는 나의 유일한 육체는,가상현실에서는 루브르 박물관에 또는 어떤 가상현실 게임의 상황 속에 있을 수 있다. 이와 같이 가상 현실에 의해 나의 신체가 존재하는 현실이 하나가 아니라 다수로 파편화되며, 따라서 나의 신체와 지속적인 상응관계에 놓여져 있는 나의 자아 역시 파편화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자아가 해체될 때 우리의 육체는 그것에 제한을 가했던 중심적 통제력의 몰락을 경험하며 무절제한 방임 속으로 빠져든다. 이제 정보화 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현대인은 점차 가상 공간으로 이주 (移住) 할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현대인은 자아의 파편화란 상처를 감수해야만 한다. 이렇게 자아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원초적 불안은 더욱 증폭될 수밖에 없으며 결국 현대인은 디오니소스적 흥분과 동요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고 마는 것이다.

과연 이 용납할 수 없는 역설로부터 탈출구는 있는가.

인간존재의 근본 분위기가 불안으로 채워져 있다면 불안으로부터의 영원한 탈출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불안을 추방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최첨단 수단 때문에 그것이 증폭되고 있다면, 그 증폭된 만큼의 불안은 우리의 태도에 따라 진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허무주의에 방치된 삶의 의미를 사색하고 파열의 위기 속에 처해 있는 자아를 보듬음으로써 불안을 다스리고 진정시키는 반성력을 회복하려는 태도일 것이다. 인간이 지금까지 몸담지 못했던 더 많은 가상적 세계를 열어 줄 새로운 세기에도 여전히 자아를 보듬고 허무주의를 넘어서려는 사색이 기술의 발전만큼 깊어지지 않는다면 암울한 불안의 먹구름으로 뒤덮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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