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원(과학기술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이 2022. 9. 17. 중앙선데이 칼럼에 올린 글을 다시 올립니다(*출처 :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02279).
지난 7월 말 개봉한 ‘한산:용의 출현’은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 승전보를 담은 영화로 김한민 감독의 3부작 프로젝트 중 2014년 ‘명량’에 이은 두 번째 작품이다. 국뽕으로 취급해도 어쩔 수 없지만 전대미문의 국가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영웅의 이야기는 언제나 감동적이다.
며칠 전 미국 에미상 시상식에서 ‘오징어게임’이 감독상과 남우주연상을 포함해 6개 부문을 수상했는데 영어가 아닌 작품으로는 처음이라고 한다. 또 다른 국뽕 상황이다. 인기의 비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이야기가 주는 보편성이 큰 몫을 차지한다. 빚에 쪼들린 주인공, 탈북민, 외국인노동자, 건달 등 구석으로 몰린 465명의 군상들이 처해 있는 상황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상시적으로 목도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지금 거의 모든 분야 위기
이순신 때처럼 극복도 필요하지만
그런 상황 처하지 않는 게 더 중요
미래지향적 논의 바로 시작해야 |
하지만 이 감동의 이면에 있는 상황을 조금 삐딱하게 바라보자. 외부로부터 오는 위협에 무지하거나 애써 외면하고 내부 다툼과 갈등으로 결국에는 국가가 망하는 상황은 역사적으로 매우 흔하다. 강대국 간의 갈등, 기술혁신으로 인한 산업 패러다임 변화, 기후변화 등의 충격에 오징어게임 참가자 465명 개개인의 상황이 사회 전반에 만연되는 상황을 더해 보면 된다. 이런 위기에 불세출의 영웅의 리더십으로 극복하는 사례가 있다. 하지만 이런 사례는 매우 드물며,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정도의 성공은 쉽게 반복되지 않는다.
430년 전이기는 하지만 나라의 운명을 걸고 싸우고 있는 장수가 ‘신에게는 아직 전선이 12척이나 있습니다(今臣戰船 尙有十二)’라는 장계를 올려야 하는 상황은 너무 처참하다. 제대로 된 국가나 사회라면 이런 상황에 직면해서는 안 되고 이런 외침이 나와서는 안 된다. 문제는 우리나라가 이런 상황에 직면할 가능성이 작지 않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외환위기 이후 25년 만에 경제·사회·산업·안보·보건·환경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복합위험에 처해 있다. 3고(고금리, 고물가, 고환율) 위기와 경기 침체, 가계 부채 및 기업실적 악화, 사회갈등 격화, 지방 소멸, 미·중 패권경쟁 대응 및 대일 외교 정상화, 공급망 위기, 경제안보 및 기술주권 확보, 산업경쟁력 저하, 감염병 재유행, 태풍 등 극단적 기후현상으로 인한 초대형재난 발생 등등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거대한 변화와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오징어게임 참가자 465명의 상황의 합이 바로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대부분의 정책은 그 영향을 오래 남기기 때문에 설계 단계에서부터 미래 불확실성을 고려해야 한다. 단기적 사안에 매몰되어 결국에는 ‘아직도 12척의 배’를 외치는 상황에 몰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미래지향적 정책이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현실은 녹녹치 않다. 새로 출범한 정부에 대한 국민의 평가가 이례적으로 부정적이다. 사회를 혁신할 동력이 보이지 않는다. 설문에 따르면 부정적 평가 이유로 경험과 능력 부족, 독단적이고 일방적인 행태, 인사 실패 등 여러 가지가 거론되었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가장 큰 이유는 미래 방향성의 부재이다. 새 정부가 추구하고 있는 미래 아젠다가 무엇인지 도대체 모르겠다는 것이다.
원전, 법인세, 재정건정성, 연금, 노동, 교육, 부동산 등 많은 정책에 대한 방향 전환을 충분한 공감대 없이 시도한다. 하지만 이렇게 쉽게 해결될 문제라면 이미 해결되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정책 문제는 적어도 10년 이상 지속적으로 지적되었던 구조적인 문제이다. 뚜렷한 정답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혹시 정답이 있다고 하더라도 유효 기간이 제한적이다. 직전 정부는 이런 문제 해결에 실패하여 대선에서 패배한 것인데 새 정부 또한 똑같이 잘못된 경로를 따라가고 있다. 이대로라면 5년이 지나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민의를 대변하는 국회는 현재 세대와 미래세대 간 이익의 균형점을 찾아야 하는 곳이지만 실제 돌아가는 현상은 현재중심적이다. 다음 선거를 위해 투표권을 가진 현재 세대에게 집중된다. 미래 이슈에 대한 치열한 논의는 없고 행태도 과거지향형이다. 대선 이후 여당과 야당이 바뀐 국회에서는 과거 자신의 주장을 바꾸면서 스스로를 부정하고 “과거에는 당신들이 이랬다”라면서 상대방을 비난한다. 이 비난의 악순환에서 자유로운 정당은 없다. 모든 초점이 오직 지지자에게 맞추어져 있으며 사회가 당면한 문제 해결에는 가장 비생산적인 방식으로 접근한다. 오죽하면 한국행정연구원의 ‘사회통합실태조사’에 따른 국회 신뢰도가 34.4%로 조사 기관 중 꼴찌일까.
한 방에 해결될 수 있는 쉬운 정책 문제는 없다. 미래에 관한 문제는 더더욱 그러하지만 대안을 모색하는 방식은 과거지향형이다. 이제 ‘이전 정권보다’ 가 아니라 ‘미래 세대 이익을 위해서’, ‘단기적 성과’에서 ‘장기적 효과’로, ‘요소’에서 ‘시스템’으로 논쟁의 틀을 바꾸어야 한다. 여전히 남아 있는 나쁜 관행, 과거 성공모델 집착, 단기적 성과 지향, 취약한 제도적 법적 문화적 기반 등등이 장애물로 작동할 것이다.
하지만 국민이 원하는 것은 정답이 아니라 정답을 찾기 위한 치열하지만 투명한 논쟁, 논의 과정에 참여 보장 그리고 정치권의 진정성 아닐까? 이 모든 것은 사회 전체가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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