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에서 진정으로 얻어야 할 것

박상준 승인 2024.02.08 09:28 | 최종 수정 2024.02.09 10:32 의견 0


SF에 대한 선입견 중에 ‘미래를 가능한 한 정확하게 예측한다’는 것이 있다. 그래서 터무니없는 미래상을 묘사한 작품을 보면 SF로서 수준이 떨어진다고 폄하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은 미래학자나 점쟁이, 예언가의 몫이다. SF 작가는 미래의 다양한 시나리오들을 스펙트럼처럼 펼쳐 보일 뿐이다. 실현 가능성과는 상관없이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펼쳐 보인다는 점에서 다른 장르의 예술가들과 똑같다. 얼마나 현실성이 있는지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그저 그 다양한 가능성들을 음미해보는 것이 SF를 즐기는 방법이다.

다만 SF는 설정이나 논리를 전개할 때 가능한 한 과학적 합리성을 지키는 편이므로, 작품 속 전망이 실제 현실로 나타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중에 흥미로운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한다. 2차 대전 중에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1944년 어느 날, FBI 수사관들이 뉴욕에 있는 한 싸구려 잡지사에 들이닥쳤다. 잡지의 이름은 ‘어스타운딩 사이언스 픽션(Astounding Science Fiction)’. 당시 미국에서 발간되던 통속적인 SF잡지 중의 하나로서, 자극적인 그림의 표지나 조악한 지질 등등의 이유로 그다지 점잖은 대접은 못 받던 매체였다. 그러나 그들의 혐의는 국가기밀 누설이었다. 당시 미군에서 극비리에 개발 중이던 가공할 신무기가 그 잡지의 한 단편소설에 생생하게 묘사되었던 것이다.

문제의 작품은 클리브 카트밀이란 작가가 쓴 ‘데드라인’이었는데, 여기서 묘사한 가공할 신무기란 다름 아닌 원자폭탄이었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는 전쟁 당사국들이 결국 원폭을 사용하지 않기로 선언한다. 원폭의 위력이 너무나도 대단해서 인류에게 큰 위협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 정부는 세계 최고의 과학자들을 끌어모아 맨하탄 프로젝트라는 이름 아래 극비리에 원폭을 개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언론 매체에 그와 관련된 일체의 정보 공개를 막았고, 심지어 과학잡지에서 학술적인 주제가 되는 일도 교묘하게 방지했다. 그러나 SF잡지는 아무런 통제나 공작도 취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었다. 유치한 SF작가나 독자들 따위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핵무기에 대해 공개적으로 자유롭게 논의했던 사람들은 SF잡지와 그 독자들 뿐이었다고 한다.

아무튼 수사관들은 기밀 누출을 의심했지만 사실 그 작가는 공공도서관에서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물리학 이론서들만을 참고하여 작품을 썼을 뿐이었다. 나머지는 오로지 작가의 상상력만으로 채워진 것이다. 보안 당국에서는 결국 이 사건이 순전히 우연의 일치, 아니 SF작가의 상상력에 기인한 필연적인 우연(?)임을 깨달았다. 어쨌거나 당시 SF독자들은 상당히 어깨가 으쓱해졌다고 한다.

이렇듯 SF작가들의 자유분방한 상상력은 때때로 과학자들이 미치지 못하는 창조적인 영역까지 뻗어나간다. 그리고 그런 과감한 상상력이 과학기술자들에게 영감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세계적인 SF작가이자 미래학자이기도 했던 아서 클라크는 뛰어난 과학자들조차도 때로는 완고한 보수성을 고집하여 오히려 과학기술 발달에 장애가 될 때도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예를 들어서 기관차나 자동차가 처음 만들어질 당시, 과학자들은 시속 30km만 넘어가면 사람은 숨을 쉴 수가 없어서 질식하고 말 것이라고 엄숙하게 선언했다고 한다. 또 20세기 초반까지 거의 모든 과학자들은 공기보다 무거운 물체는 결코 하늘을 날 수 없다고 확신에 차서 얘기하고 있었다. 비행기를 발명하려는 사람들을 비웃으며 하는 말이었다. 당시 미국의 저명한 천문학자였던 사이먼 뉴컴은 대표적인 비행기 불가론자였는데, 그의 생각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라이트 형제가 시험 비행에 성공했다. 그러자 뉴컴은 비행사 한 명 정도 무게 이상은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며 한발 물러섰다고 한다.

우주비행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꽉 막힌 과학자들이 있었다. 1950년대 중반에 영국 왕립 천문대장을 맡게 된 리처드 울리 박사는 우주여행이란 허튼소리라고 코웃음을 쳤던 인물인데, 바로 그다음 해에 소련에서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하는 데 성공했다.

아서 클라크는 이상과 같은 예들을 들면서 ‘저명한, 그리고 나이가 지긋한 과학자가 어떤 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면 그건 거의 옳다. 그러나 그가 어떤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틀릴 가능성이 높다’라는 상당히 시니컬한 어록을 남기기도 했다.

결국 우리가 SF에서 얻어야 할 교훈은 구체적인 미래 전망보다 현실의 통념을 깨고 그 너머를 상상하는 자세 그 자체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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