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3·1정신의 소유자 스코필드 박사

스코필드는 3·1운동을 주도한 33인의 민족 지도자 못지않게 만세 시위를 준비하고 우리의 독립 의지와 일제의 만행을 널리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해방 이후로도 삼일절 때마다 신문 기고로 우리 민족에게 3·1정신을 일깨웠다.

이희용 승인 2024.11.26 08:00 | 최종 수정 2024.11.27 17:49 의견 0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의 독립유공자 묘역에는 유일하게 순수한 외국인의 무덤이 있다. 묘비에는 ‘애국지사 프랭크 W. 스코필드의 묘’란 글귀 아래 “내가 죽거든 韓國(한국) 땅에 묻어 주시오. 내가 도와주던 少年(소년) 少女(소녀)들과 불쌍한 사람들을 맡아 주세요”라는 유언을 새겨놓았다.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는 ‘푸른 눈의 독립운동가’, ‘34번째 민족대표’라고 불린다.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최연소이자 마지막 생존자였던 이갑성 초대 광복회장은 그를 이렇게 회고했다.

“당시 외국인 선교사 거의 전부가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하기를 꺼린 것은 사실이오. 그런데 박사는 처음부터 달랐소. 나이도 31살밖에 되지 않은 그가 어떻게 그렇게 용감하고도 침착하게 우리 편을 들 수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소. 다른 외국인은 흉내도 못 낼 노릇이었소. 난 늘 박사가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을 위해 하늘에서 보내준 천사인 것 같이 느껴왔소.”

스코필드는 1889년 3월 15일 영국에서 태어난 뒤 1907년 캐나다로 건너가 토론토대 수의과에 입학했다. 1910년 소아마비를 앓아 평생 지팡이에 의지해야 했다. 1911년에는 수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16년 올리버 에이비슨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장의 권유 편지를 받고 그해 11월 조선 땅을 밟았다. 세브란스 의전에서 세균학과 위생학을 강의하며 선교사 자격도 얻었다. 한국식 이름은 석호필(石虎弼)이었다.

3·1운동을 비밀리에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외국인은 스코필드가 유일했다. 세브란스 의전 출신의 이갑성이 2월 5일 거사 계획을 미리 알리며 해외 정세를 물어보자 그는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한 평화 원칙 14개조와 1차대전 종전 후 열리고 있던 파리 평화회의 등을 담은 외국 신문을 전해주었다.

이갑성은 삼일절 전날 밤 스코필드에게 독립선언서를 건네며 영어로 번역해 미국 백악관에 전달해줄 것을 부탁한 데 이어 당일 아침에도 찾아와 그날 오후 열릴 시위 사진을 찍어 해외에 알려 달라고 요청했다.

스코필드는 탑골공원, 종로, 덕수궁 앞에서 벌어진 만세 시위의 사진을 찍어 해외에 전했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서울 프레스’와 중국 상하이에서 발행되던 ‘차이나 프레스’ 등 영자신문에도 기고했다. 서대문형무소와 대구형무소 수감자들을 찾아 고문 흔적을 확인한 뒤 조선 총독과 정무총감 등을 항의 방문해 비인도적 만행 중지를 촉구하기도 했다.

만세 시위의 불길이 전국으로 번지는 도중 4월 5일과 15일 경기도 화성군 장암면 수촌리와 향남면 제암리 등지에서 일제가 학살극을 벌이자 스코필드는 열차와 자전거를 번갈아 타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학살 흔적을 사진으로 촬영하고 현장 주민들의 증언을 수집한 뒤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보고서를 작성해 해외에 보냈다.

일제의 눈엣가시가 된 스코필드는 1920년 4월 강제 출국돼 캐나다로 돌아갔다. 그곳에서도 꾸준히 편지를 띄워 조선인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그는 1958년 한국 정부의 초청을 받아 다시 내한해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로 임용됐다. 고아들을 돌보고 가난한 학생에게 장학금을 전달하는가 하면 민주화와 반부패 운동에도 앞장서는 등 한국과 한국인을 향한 헌신적 태도는 변함없었다.

해마다 삼일절이 되면 우리 민족에게 3·1정신을 일깨우는 글을 신문에 실었다. “이기주의와 부패 속에서 낡은 싸움을 벌여야 할 건가, 아니면 봉사와 희생의 3·1정신을 따라야 할 건가 결단해야 한다.”(1963. 2. 28 동아일보), “기념식이 아무리 웅장하고 동상이 장엄하더라도 사랑과 정의의 행동이 없다면 3·1정신은 쓰러져갈 것이 분명하다.”(1969. 3. 1 동아일보), “한국인은 3·1운동과 같은 정신적 운동을 언제나 전개해야 한다. 내가 모든 친지의 만류를 무릅쓰고 한국에 온 것은 이러한 운동의 지지자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1969. 3. 1 중앙일보), “1919년 젊은이들과 늙은이들에게 진 큰 부채를 잊지 마라. 한민족은 때로 항거하지 않으면 안 될 경우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 혼까지 잃고 만다.”(1970. 3. 2 동아일보)

한국 정부는 1960년 스코필드에게 외국인 최초로 문화훈장을 수여한 데 이어 1968년 건국훈장(독립장)을 주었다. 1970년 4월 12일 눈을 감을 때 마지막 남은 책 한 권, 구두 한 켤레까지 주위 사람에게 나눠주고 재산 모두를 보육원과 YMCA에 헌납했다.

화성시 제암리의 독립운동기념관에는 스코필드의 동상과 함께 자전거와 사진기가 전시돼 있고, 서울 신문로의 돈의문박물관에도 스코필드기념관이 들어섰다. 호랑이스코필드기념사업회는 2016년 스코필드장학문화사업단을 발족해 해마다 장학생 34명을 돕고 있다.

저작권자 ⓒ 창조아고라,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