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두 차례나 쫓아낸 매큔 선교사

매큔 선교사는 ‘105인 사건’과 3·1운동 때 독립운동가들을 돕고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다가 일제의 미움을 사 한국을 떠나야 했다. 7년 뒤 재입국한 뒤에도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서고 신사참배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자 일제는 숭실학교 교장 자격을 박탈하고 미국으로 추방했다.

이희용 승인 2024.11.12 09:41 의견 0
조지 섀넌 매큔


우리나라에 들어온 서양 선교사 가운데 가장 먼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인물은 조지 섀넌 매큔이다. 일제에 의해 두 차례나 추방당하면서 애국계몽운동에 헌신하고 독립운동을 도운 공로로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국가보훈부는 2020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해 기념행사를 열었다.

매큔은 1873년 12월 15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서 태어났다. 한국식 성명은 윤산온(尹山溫)이다. 스코틀랜드계 사람들은 손자란 뜻의 ‘맥(Mac)’을 이름 앞에 흔히 쓴다. 맥아더는 아더의 손자 가문을 일컫는다. 매큔은 앞글자 ‘맥’을 뺀 ‘윤(尹)’을 성으로 삼고 이름은 미들네임 '섀넌'과 비슷한 발음의 '산온'이라고 정했다.

파크대와 미주리대를 졸업하고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1905년 아내와 함께 한국에 파송됐다. 미국 북장로교가 평양에 설립한 미션스쿨 숭실학교 교사로 부임했다가 1909년 평안북도 선천의 개신교계 중학교인 신성학교 교장으로 옮겼다.

그는 1911년 9월에 터진 이른바 ‘105인 사건’을 계기로 독립운동과 본격적인 인연을 맺었다. 일제는 데라우치 마사다케 조선총독 암살미수 사건을 조작해 이승훈·윤치호·이동휘 등 민족지도자 600여 명을 체포하고 이 가운데 105명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신성학교 학생과 교사들도 구속돼 고문을 당했고, 매큔도 학생을 선동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는 경찰의 횡포에 항의하고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총독 면담을 요청했다. 선천 보성학교 책임을 맡고 있던 부인은 미국 교회에 편지를 보내 불법 구금, 고문, 사건 조작 사실을 폭로했다.

1919년 3·1운동의 물결이 선천으로도 번졌다. 매큔은 시위에 동참한 학생들을 집에 숨겨주었다. 일본 경찰이 찾아와 집을 수색하려 했으나 단호히 거부했다. 그는 독립의 정당성과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 사실을 알리는 글을 작성한 뒤 우편 검열을 피해 인편으로 미국 시카고의 잡지사 ‘콘티넨트(The Continent)’로 보냈다.

콘티넨트에 매큔의 글이 실리자 미국에 일제를 비판하고 한국 독립을 지지하는 여론이 일었다. 미국에서 발행되던 대한인국민회 기관지 ‘신한민보’(1919년 4월 19일자)도 이 사실을 보도했다. 매큔은 3·1운동에 앞서 일본 도쿄에서 발표된 2·8 독립선언서 영어 번역문을 교정하기도 했다.

일제는 매큔을 눈엣가시로 여겼다. 감시와 탄압을 견디다 못한 매큔은 1921년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7년 뒤 재입국했다. 새뮤얼 오스틴 모펫(마포삼열) 선교사가 숭실전문학교와 숭실학교 교장 자리에서 물러나자 후임으로 임명된 것이다.

매큔은 농촌계몽운동에도 앞장섰다. 숭실전문학교에 1928년 부설 농업강습소를 세운 데 이어 1931년 정식으로 농업과를 개설했다. 월간지 ‘농민생활’도 1929년 6월 12일 창간해 농민을 각성시키고 영농 지식을 전달했다.

일제는 1930년대 들어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1925년부터 공사립 각급학교에 실시하려다가 기독교계 학교들이 거세게 반발하자 사립학교는 일단 제외했으나 1931년 만주사변과 함께 대륙 침략을 본격화하며 모든 학교에 의무화한 것이다.

천주교, 개신교 단체와 소속 학교들은 대부분 일제의 협박에 굴복해 신사참배를 수용했으나 매큔은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야스타케 다다오 평안남도지사는 1936년 1월 교장 자격을 박탈했고 그해 3월 미국으로 추방했다.

그가 한국을 떠날 때 평양 시민 수천 명이 눈물로 전송했다. 숭실학교는 그 뒤로도 신사참배를 못 하겠다고 버티다가 1938년 자진 폐교했다. 해방 후 서울에서 재건해 숭실고와 숭실대로 명맥을 잇고 있다.

매큔은 그 뒤로 한국 땅을 밟지 못했다. 미국에서도 일제의 비인도적 식민통치를 폭로하는 기고와 강연에 나서고 북미한인학생회 자문위원을 맡는 등 독립운동을 돕다가 1941년 12월 4일 시카고 장로회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한국에서 태어난 두 아들은 한국학 정립과 발전에 큰 공로를 세웠다. 역사학자인 장남 조지 매커피 매큔은 언어학자 에드윈 라이샤워와 함께 1939년 한국어 로마자 표기법을 만들었다. 차남 새넌 보이드베일리 매큔은 지리학자로 한국에 관한 지리서와 연구논문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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