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범죄 꾸짖은 ‘일본의 양심’ 소다 가이치

소다 가이치는 우리나라 근대식 보육원의 효시인 가마쿠라보육원에서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는 데 정성을 쏟아 고아들의 아버지로 불렸다. 105인 사건과 3·1운동 때는 구속자 석방 운동을 벌이고 해방 후에는 일본인에게 회개를 촉구했다.

이희용 승인 2024.11.05 08:00 | 최종 수정 2024.11.06 14:11 의견 0
'한국 고아들의 아버지'로 불리는 소다 가이치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는 15개국 417명의 유해가 묻혀 있다. 대부분 서양인이지만 묘비의 주인공 가운데는 일본인도 한 명 있다. 비석 전면에는 십자가와 함께 '孤兒(고아)의 慈父(자부) 曾田嘉伊智先生之墓(소다 가이치 선생 지묘)'라고 새겨져 있다.

그는 어떤 인연으로 이 땅에 건너와 지내다가 이곳에 묻혔을까. 또 어떤 삶을 살았기에 ‘고아의 자애로운 아버지’라고 불렸을까.

1867년 조슈번(지금의 야마구치현)에서 태어난 소다는 젊은 시절 초등학교 교사, 탄광 광부, 노르웨이 상선 선원, 독일 회사 직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1899년 어느 날 대만에서 술에 취한 채 길에서 넘어져 죽어가고 있을 때, 그를 불쌍히 여긴 한 한국인이 여관으로 업고 데려가 치료해주고 밥값까지 내줬다. 소다는 은인의 나라에서 봉사하겠다는 마음으로 1905년 6월 한국에 건너왔다.

소다는 서울YMCA 전신 황성기독교청년회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다가 YMCA 종교부 총무 이상재의 전도로 개신교에 귀의했다. 1909년 숙명여고와 이화여고 영어 교사 우에노 다키코와 결혼한 뒤 서울 중구 회현동의 경성감리교회 전도사가 됐다.

1911년 9월 일제가 데라우치 마사다케 조선 총독 암살을 모의했다는 혐의를 날조해 윤치호·이상재 등 민족지도자들을 대거 검거하는 105인 사건을 일으키자 소다는 “무고한 사람을 당장 석방하라”고 총독부에 요구했다. 1919년 3·1운동 때도 구속자 석방 운동을 벌이는가 하면 법정에서 이상재 재판을 맡은 판사를 꾸짖기도 했다.

그는 일본 아동복지사업의 선구자로 불리는 사다케 오토지로의 부탁을 받고 고아들을 돌보는 일에 뛰어들었다. 사다케는 1896년 일본 가마쿠라에 보육원을 만든 뒤 1913년 중국 뤼순에 이어 1921년 서울 용산구 후암동에도 지부를 내며 소다에게 운영 책임을 맡겼다.

소다는 우리나라 근대식 보육원의 효시인 가마쿠라보육원에서 정성껏 아이들을 돌봤다. 1926년 아내도 교사를 그만두고 합류했다. 거리에 버려진 아이가 넘쳐나던 시절, 1929년 세계 대공황까지 겹쳐 보육원은 늘 재정난에 시달렸다. 소다는 가마쿠라보육원 출신이 나중에 독립운동가가 됐다는 이유로 헌병에게 끌려가 고초를 겪기도 했다.

1943년 소다는 76세의 나이로 함경남도 원산의 일본인교회에 초빙됐다가 그곳에서 해방을 맞았다. 1947년 10월 원산의 일본인들을 인솔해 서울을 거쳐 일본으로 돌아갔다. 부인은 고아들을 돌보느라 한국에 남았다.

그는 ‘세계 평화’라고 적힌 어깨띠를 두르고 한 손에는 성경책을 든 채 일본 전역을 돌며 “전쟁을 일으킨 일본인이 회개해야 한다”고 외치는 한편 “일본인이 인류에 범한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다.

소다가 귀국한 뒤 가마쿠라보육원은 북한 신의주에 보린원을 세웠던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가 이어받아 영락보린원이 됐다. 부인은 1950년 1월 숨져 양화진에 먼저 묻혔으나 한일 간 국교가 수립되지 않았을 때여서 소다는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일본 아사히신문 기자가 1960년 소다의 사연을 소개하며 방한 허용을 촉구하는 칼럼을 싣자 한일 양국에서 동정 여론이 일어나 1961년 5월 특별기편으로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소다는 영락보린원에서 아이들과 함께 여생을 보내다가 이듬해 3월 28일 95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장례식은 지금의 서울시의회 건물인 국회의사당에서 사회단체연합장으로 치러졌다. 정부는 일본인에게는 처음으로 문화훈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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