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MCA 창립한 근대 체육의 아버지 질레트
질레트 선교사는 서울YMCA 전신인 황성기독교청년회 창립의 산파역으로 이 땅에 청년운동과 시민운동의 씨앗을 뿌렸다. 야구, 농구, 스케이트, 복싱 등 서구 스포츠를 소개한 근대 체육의 아버지로도 꼽힌다.
이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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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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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4년 6월 6일 영국 런던에서 백화점 점원 조지 로저스를 비롯한 청년 12명이 기독교청년회(YMCA)란 이름의 모임을 결성했다. 산업혁명 이후 혼란한 사회 분위기에서 청소년들이 기독교 정신을 토대로 건전하게 친교를 나누고 여가를 즐기도록 하자는 취지였다. YMCA 180년 역사의 시작이다. 11년 뒤 프랑스 파리에서 YMCA 세계연맹이 발족했고, 오늘날 120개국 6,500만 명의 회원을 거느린 단체로 성장했다.
1899년 개화사상을 품은 상류층 청년 150여 명이 대한제국에도 YMCA를 창설해 달라는 요청서에 서명해 북미YMCA 국제위원회에 보냈다. 당시 양반 자제들은 신도 대부분이 평민과 천민인 교회에 발을 들여놓기를 꺼려 교회 대신 YMCA를 신앙과 친교의 공간으로 삼으려고 한 것이다.
북미YMCA 국제위원회는 창설 책임자로 미국 일리노이주 출신의 필립 질레트를 파견했다. 콜로라도대와 예일대에서 수학했고 YMCA 전도 담당 부목사로 활동한 경험도 있었다. 1901년 10월 말 제물포항에 도착해 2년간의 준비 끝에 1903년 10월 28일 닻을 올릴 수 있다.
서울 정동의 유니언회관에서 열린 황성기독교청년회(서울YMCA의 전신) 창립총회에는 한국인과 서울에 거주하던 미국·영국·일본인 등 6개국 37명이 참석했다. 질레트가 초대 총무로 선임됐고 제임스 게일과 호머 헐버트가 각각 회장과 부회장에 추대됐다. 우리나라 시민단체의 효시였다.
질레트는 1904년 종로2가 대지를 사들여 가건물을 짓고 본격적인 사업을 벌였다. 윤치호, 이상재 등 독립협회 지도자들도 속속 가입해 활기를 띠었다. 성경 공부를 비롯해 목공·제화·염색·사진·인쇄 등 기술 교육, 체육 강습, 야학, 시민 강좌 등 프로그램도 다양해 젊은이들이 몰려왔다.
창립의 산파역인 질레트는 ‘근대 체육의 아버지’로 불린다. 야구, 농구, 스케이트, 복싱 등 각종 서구 스포츠를 소개하고 보급했다. 1904년 미국에 주문한 배트와 글러브 등 야구 장비가 들어오자 YMCA 야구단을 창단했다. 1906년 3월 15일 서울 동대문 인근 훈련원에서 덕어(德語·독일어)학교 팀과 벌인 경기는 한국인 최초의 야구 경기로 기록돼 있다. YMCA 야구단은 지방을 돌며 야구 붐을 주도하는가 하면 1912년 일본으로 건너가 국내 스포츠 사상 최초의 해외 원장 경기에 나서기도 했다.
1908년 12월에는 종로2가에 3층짜리 회관을 건립해 장안의 화제가 됐다. 대한제국의 개화파 관료 현흥택이 토지를 희사하고 미국의 백화점 왕 존 워너메이커가 거액을 기부했다. 고종 황제도 은삽 두 자루와 금일봉을 하사했고 영친왕이 머릿돌에 글씨를 썼다. 지금의 8층짜리 회관은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옛 건물이 소실된 뒤 1967년 새로 지은 것이다.
YMCA는 신앙과 친교 단체에만 머물지 않았다. 애국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의 거점이었다. 1905년과 1907년 을사늑약과 고종 양위 반대운동을 펼쳤다. 1911년에는 일제가 조선 총독 암살 미수사건을 조작한 ‘105인 사건’에 연루돼 윤치호, 이승훈, 양전백 등 YMCA 관련 인사가 중형을 선고받았다.
질레트는 호러스 언더우드와 새뮤얼 모펫 등 선교사들과 함께 총독부에 거세게 항의하는 한편 사건 전모를 낱낱이 기록한 보고서를 영국 국제기독교선교협회로 발송했다. 중국 일간지 차이나프레스가 이를 입수해 공개하자 총독부는 질레트의 사퇴를 종용했다.
결국 질레트는 1913년 6월 중국에서 열리는 YMCA 지도자 강습회에 참가했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중국 각지에서 YMCA 총무로 활동하고 상해임시정부에도 재정 지원을 하다가 1932년 퇴임했다. 1937년 미국으로 돌아가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1903년 엘런 버사와 결혼해 낳은 두 딸 가운데 첫딸은 1905년 숨져 양화진 외국인묘역에 묻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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