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눈의 항일 언론인 베델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은 러일전쟁을 취재하는 특파원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가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다. 대한매일신보는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폭로하는가 하면 의병의 활동상을 소개하고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는 등 민족지들이 해내지 못한 언론 역할을 해냈다.

이희용 승인 2024.10.22 08:00 의견 0
영국 남서부의 작은 도시 브리스틀 출신 어니스트 베델은 종군기자로 조선을 찾았다가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고, 조선의 독립을 위해 짧은 생애를 바쳤다.


1900년대 초 항일 논조로 이름난 대한매일신보가 올해로 창간 120주년을 맞았다. 창간의 주역인 어니스트 베델은 1872년 영국 브리스톨에서 태어났다. 1888년부터 일본에 살면서 무역상을 하다가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이 터지자 런던에서 발행되는 일간지 데일리크로니클의 특별통신원 자격으로 3월 10일 한국 땅을 밟았다. 고종은 취재에 필요한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하고 배설(裵說)이란 한국식 이름도 지어주었다.

한동안 특파원으로 일하던 베델은 중국과 일본에서는 영자지가 여러 종 발행되는데 한국에는 하나도 없으니 해볼 만하다고 생각해 영자지 발행을 결심했다. 자신이 쓴 반일 성향 기사가 본사에서 몇 차례 퇴짜를 맞은 것이 동기가 됐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영자신문만으로는 구독자를 확보하기 어려워 한글판도 함께 내기로 하고 자신의 통역을 맡은 양기탁을 끌어들였다. 독립협회 회원과 만민공동회 간부를 지낸 그는 당시 궁내부 예식원에서 번역관보로 일하고 있었다.

베델은 제호를 코리아데일리뉴스(대한매일신보)로 정하고 1904년 7월 18일 창간호를 냈다. 6개면 가운데 4개면은 영문, 2개면은 한글로 된 타블로이드판이었다. 초기에는 영문 비중이 높았으나 1905년 3월 휴간에 들어간 뒤 일본에서 한자 활자와 인쇄시설을 들여와 8월부터 국한문을 혼용한 4면짜리 대한매일신보와 4면의 영문판 코리아데일리뉴스를 분리 발행했다.

양기탁은 궁내부 직원 신분이어서 신문 제작에는 전념할 수 없는 처지였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튿날 궁내부에 사표를 던지고 신문사 일에만 매달렸다.

일본은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한 이후 군사 보안 등을 이유로 한국인이 발행하는 신문과 잡지에 사전 검열을 실시했다. 헌병과 경찰을 동원해 원고와 신문을 압수하거나 언론인을 붙잡아갔다. 대표적인 사례가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사설을 쓴 황성신문 주필 장지연이었다.

그러나 베델은 영국인이어서 대한매일신보에는 강압 수단을 사용할 수 없었다. 대한매일신보는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주장하는 기사를 싣고 장지연 구속과 황성신문 정간 사실을 보도하는가 하면 ‘시일야방성대곡’ 전문과 영어 번역문을 함께 실은 호외를 발행했다.

대한매일신문의 인기가 높아지자 일제는 1906년 9월 1일 통감부 기관지로 경성일보 일본어판과 한국어판을 창간한 데 이어 12월 12일 영자지 서울프레스를 창간했다. 일제의 맞불 작전에도 불구하고 대한매일신보는 사세가 계속 팽창해 민족지들이 해내지 못한 언론의 기능과 민족의 구심점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1907년 1월 고종은 베델의 주선을 통해 을사늑약에 반대한다는 사실을 영국 런던트리뷴에 밝혔다. 대한매일신보도 이를 옮겨 실었다.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로 해산된 뒤에는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활동상을 상세히 소개했다. 국채보상운동이 발의되자 지원금총합소를 설치하고 출연자 명단과 의연금 액수를 매일 게재했다.

대한매일신보는 1907년 5월 23일 기존의 국한문판과는 별도로 한글판을 냈다. 그해 9월 3일 기준으로 국한문판 8,000부, 한글판 3,000부, 영문판 400부를 발행했다. 이듬해에는 국한문, 한글, 영문을 합쳐 1만3,256부를 발행했는데 이는 당시 서울에서 나오는 신문 전체를 합친 것보다 많은 부수였다.

일본은 당시 동맹 관계이던 영국을 통해 베델의 활동에 재갈을 물리려 했다. 주한 영국공사가 베델에게 회유와 압력을 시도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영국 정부는 중국 상하이로 강제 소환해 6개월 금고형을 내렸다. 베델은 1909년 5월 1일 그곳에서 심근비대증으로 숨졌다,

베델의 유언은 “나는 죽어도 신문은 영생케 해 한국 동포를 구하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고종도 소식을 듣고 “하늘은 무심하게도 왜 그를 이다지도 급히 데려갔단 말인가”라며 애통해했다. 서울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안장됐으며 1968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베델에 이어 발행인을 맡은 영국인 앨프리드 만함은 주한 영국총영사의 강압에 못 이겨 대한매일신보를 1910년 5월 21일 일제에 넘겼다. 통감부는 한일강제합병이 이뤄지자 ‘대한’을 빼고 매일신보란 이름의 총독부 기관지로 만들었다. 해방 뒤에는 미군정에 의해 정간됐다가 서울신문으로 제호를 바꿔 정부 기관지로 재탄생했다. 서울신문은 한동안 우리사주조합이 주도하는 구조로 운영되다가 2021년 최대주주가 민간기업(호반건설)으로 바뀌었다.

양기탁은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는 데 힘을 보태고 독립군과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는 등 항일투쟁을 벌이다가 1938년 중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한국프레스센터가 있는 서울신문 사옥 1층 로비에는 대한매일신보 지면이 새겨져 있고 그 앞에 베델과 양기탁의 흉상이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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