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근대교육의 토대 만든 스크랜턴 여사

스크랜턴 모자는 1885년 5월 감리회 선교단 일원으로 입국했다. 아들이 병원과 교회를 세워 진료와 선교에 매달리는 동안 어머니는 여성 교육에 힘썼다. 이듬해 5월 31일 정동의 한옥에서 학생 한 명을 상대로 수업을 열었다. 이화학당의 출발이다.

이희용 승인 2024.08.06 08:00 의견 0
의사이자 목사로서 의료선교에 앞장선 윌리엄 스크랜턴(좌)과
감리교 첫 여선교사로서 이화학당을 설립한 그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우)

1886년 5월 31일 서울 정동의 한옥에서 메리 스크랜턴은 ‘김 부인’으로 불린 고관의 첩을 학생으로 두고 첫 수업을 열었다. 우리나라 근대 여성 교육기관의 효시인 이화학당의 출발이었다. 김 부인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학교를 그만두었으나 곧이어 10살 난 꽃님이가 들어왔다. 말은 입학이지만 가난 때문에 딸을 키울 수 없던 어머니가 맡긴 것이었다. 콜레라로 서대문 근처에 버려진 4살짜리 고아 별단이도 이곳에서 함께 생활하며 수업을 들었다. 학생이 늘어나자 200평 규모의 기와집 교사를 지었고, 1887년 4월 고종이 ‘이화학당(梨花學堂)’이라고 쓴 편액을 하사했다. “배꽃처럼 순결하고 아름답고 향기로운 열매를 맺으라”는 뜻을 담았다.

미국 매사추세츠주 목사 집안에서 태어난 스크랜턴 여사는 1853년 결혼해 아들 윌리엄 벤튼 스크랜턴을 낳았다. 1872년 남편과 사별한 뒤 감리교 여성해외선교사회에 가입해 해외 선교를 꿈꿨다. 아들은 예일대와 뉴욕의대를 졸업하고 클리블랜드에 병원을 운영하다가 어머니와 함께 1885년 5월 조선에 선교사로 파견됐다. 감리교 선교단에는 배재학당을 세운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도 포함돼 있었다.

윌리엄 스크랜턴은 제중원에서 진료 활동을 하다가 호러스 알렌 제중원장과 불화를 빚자 1885년 9월 10일 정동 집에 병원을 차렸다. 환자가 늘어나자 부근의 땅과 집을 더 사들여 1886년 6월 15일 ‘미국인 의사병원’이란 간판을 내걸었다. 고종은 이듬해 4월 스크랜턴의 한국 이름 ‘시란돈((施蘭敦)’의 첫 글자를 딴 ‘시병원(施病院)’이란 현판을 내려 격려했다.

그는 서민이 많이 사는 서대문 밖 애오개(아현동)와 남대문·동대문 인근에 차례로 시약소(施藥所)를 개설, 간단한 진료를 거쳐 환자들에게 약을 나눠줬다. 동대문 시약소는 기부자의 이름을 따 볼드윈 시약소라고 불렀다. 이들 시약소는 각각 아현교회, 상동교회, 동대문교회로 발전했다.

아들이 환자 진료를 통한 선교에 매달리는 동안 스크랜턴 여사는 여성 교육에 힘썼다. 이화학당과 함께 매향여자정보고와 매향중학교 전신인 경기도 수원의 삼일여학당, 공옥여학교, 매일여학교를 세우고 진명·숙명·중앙여학교의 설립도 도왔다.

당시 조선 여성들은 근대의술의 혜택을 받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내외법이 엄격해 여성 환자가 서양 남자에게 몸을 맡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스크랜턴 여사는 여성해외선교사회에 여의사 파견을 청원했다. 메타 하워드가 입국하자 1887년 10월 31일 이화학당 옆에 보구녀관(普救女館)이란 간판을 내걸고 진료를 시작했다. 이화여대 의료원은 이날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보구녀관은 볼드윈 시약소가 1912년 릴리안 해리스 기념병원(동대문부인병원)으로 확대되면서 합병됐다.

윌리엄 스크랜턴은 성서한역통일회장을 맡아 성서 한글 번역에도 앞장섰으나 일본과 조선을 관장하는 메리맨 콜버트 해리스 선교감독의 친일 편향에 항의해 1907년 감리교 목사직을 사임했다. 성공회로 교파를 옮겨 평신도 의사로서 서울, 평북 운산, 충남 직산, 중국 다롄(大連), 일본 고베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1922년 세상을 떠나 고베 외국인묘지에 묻혔다. 그에 앞서 스크랜턴 여사는 1909년 10월 8일 숨져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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