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황제의 비밀 외교관 손탁 여사

손탁은 고종이 하사한 집을 외교사절과 조선 관리들의 사교장으로 활용했다. 그녀는 단아한 미모와 세련된 매너, 유창한 외국어 실력, 고종의 신임과 베베르 공사의 등에 힘입어 외교가의 꽃으로 떠올랐다.

이희용 승인 2024.07.09 08:00 의견 0
(좌) 마리 앙투아네트 손탁
(우) 고종이 하사한 집을 개조해 문을 연 손탁호텔



1885년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 조선 주재 초대 러시아공사가 한양(서울)으로 부임할 때 한 여인이 동행했다. 마리 앙투아네트 손탁(독일식 발음은 안토아네트 존타크)이다. 베베르의 처형, 혹은 처제로 알려졌는데 ‘윤치호 일기’에는 베베르 처남의 처형으로 기록돼 있다.

1854년 프랑스와 독일 접경지대인 알자스로렌의 독일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출생 당시에는 프랑스 국적이었으나 1870년 프랑스가 프로이센과의 전쟁(보불전쟁)에서 패해 이듬해 독일 국적으로 바뀌었다.

손탁은 베베르의 추천을 받아 1886년 경복궁의 궁내부 소속 관원으로 채용됐다. 외국인을 위한 왕실 연회를 주관하며 서양 요리를 접대하는 것이 임무였다. 독일어·프랑스어·러시아어 등 여러 언어에 능통하고 한국어까지 빨리 익혀 고종과 민비(뒤에 명성황후로 추존)의 총애를 받았다.

인테리어에도 재능을 보여 경복궁 침전과 주방의 실내장식을 서양풍으로 꾸미는가 하면 민비에게 서양 열강의 역사, 문화, 풍습, 예술 등을 소개했다. 고종에게 커피를 권해 애호가로 만든 것도 손탁이다.

고종과 민비는 청나라와 일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대안으로 러시아를 활용할 마음을 먹었다. 손탁은 조선 왕실과 러시아공사관을 연결하는 비밀 외교관 역할을 맡았다.

고종은 1895년 손탁에게 경운궁(나중에 덕수궁으로 개칭) 남서쪽의 왕실 소유 한옥 한 채와 그에 딸린 대지 1,184평을 하사했다. 지금의 중구 정동 32번지로 이화여고 백주년기념관 자리다.

손탁은 한옥 내부를 양식으로 꾸며 외교사절과 조선 관리들의 사교장으로 활용했다. 1887년 인천에 대불호텔이 들어서긴 했지만 서울에는 서양식 호텔이 없던 시절이어서 서양인들은 손탁의 집에 초대받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서양인과 조선 관리들의 사교 모임인 정동구락부와 민중계몽단체 독립협회도 이곳에서 자주 모였다. 손탁은 단아한 미모와 세련된 매너, 유창한 외국어 실력, 고종의 신임과 베베르 공사의 후광 등에 힘입어 정동 외교가의 꽃으로 떠올랐다.

손탁의 도움으로 거처를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기는 아관파천에 성공한 뒤 고종은 노고에 보답하는 뜻으로 1898년 한옥을 방 5개짜리 양옥으로 재건축해줬다. 손탁은 이를 호텔식으로 개조해 영업에 나섰다. 조선인들은 ‘손탁빈관(孫澤賓館)’, 서양인들은 손탁호텔이라고 불렀다. 서양인의 방문이 늘어나자 고종은 1902년 2층짜리 벽돌건물로 증축해줬다. 설계는 러시아공사관을 지은 사바틴이 맡았다.

종군기자 시절의 윈스턴 처칠(훗날 영국 총리), 미국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과 잭 런던 등도 이곳에 묵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곳에 투숙하며 대한제국 대신들을 초청해 협박하고 회유했다.

손탁은 190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하고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대한문 앞 팔레호텔을 경영하던 프랑스인 보에르에게 건물을 팔고 한국에 온 지 24년 만인 1909년 프랑스 칸으로 이주했다. 1922년 칸에서 숨져 시립천주교묘지에 묻혔다. 묘비에는 ‘조선 황실의 서양 전례관 마리 앙투아네트 손탁’이라고 새겨져 있다.

보에르는 손탁호텔을 1917년 이화학당에 매각했다. 이화학당은 이 건물을 기숙사로 사용하다가 4대 이화학당장 룰루 프라이를 기념하는 프라이홀을 지으며 헐어냈다. 1975년 프라이홀마저 화재로 소실돼 손탁호텔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화여고 정문 주차장 입구에 세워진 ‘손탁호텔 터’ 표석만이 외롭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저작권자 ⓒ 창조아고라,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