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풍운아 베베르 러시아공사

초대 조선 주재 러시아공사 베베르는 구한말 우리나라 역사에 구름과 바람을 몰고온 풍운아였고, 조선의 정국과 한반도 정세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서양인이었다.

이희용 승인 2024.07.02 08:00 의견 0
(좌)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
(우) 서울 舊 러시아 공사관



19세기 말 조선은 세계 열강의 각축장이었다. 동아시아의 맹주이던 청나라와 이 지역의 신흥 강국으로 부상하는 일본이 힘겨루기를 하는 가운데 영국, 프랑스, 미국, 독일, 러시아 등도 저마다의 이유로 한반도에 손을 뻗쳤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한국 병탄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자 이를 견제하기 위한 대안으로 부상한 나라가 러시아였고, 이 과정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펼친 인물이 독일계 러시아인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 조선 주재 러시아공사다.

그는 1841년 6월 17일 제정 러시아의 식민지이던 라트비아의 리에파야에서 태어났다. 상트페테르부르크대 동양학부를 다니다가 청나라로 유학한 뒤 1865년 외교관의 길로 들어섰다.

중국 베이징 주재 러시아공사관 서기를 거쳐 톈진 영사로 부임했으며, 조러수호통상조약의 산파역을 맡았다. 조약 체결 당시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3세의 전권대사를 지낸 뒤 1885년 조선 주재 초대 러시아공사로 부임했다.

그는 왕실 정원 상림원(上林苑)이 있던 중구 정동의 언덕 일대 7,500평을 지금 시세로 단돈 2억 원에 구입한 뒤 아파나시 세레딘 사바틴의 설계로 공사관을 지어 1890년 완공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외교공관이다.

1894년 청나라로 파견됐다가 동학농민운동으로 조선의 정세가 숨 가쁘게 돌아가자 다시 조선으로 파견됐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중국 랴오둥반도를 차지하고 조선에서도 세력을 확대하자 베베르는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일본에 압력을 넣었다. 이른바 삼국간섭으로, 일본도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를 계기로 베베르의 명성은 높아졌고 고종도 러시아를 눈여겨보게 됐다.

고종의 마음이 러시아로 기우는 배경에 민비(뒤에 명성황후로 추존)가 있다고 판단한 일본은 경복궁에 난입해 1895년 10월 을미사변을 일으킨다. 고종은 자신도 언제 일본인에게 목숨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베베르는 친미·친러파 관료, 미국 선교사 등과 손을 잡고 고종을 미국공사관으로 피신시키려다 실패했다. 춘생문 사건이다.

이듬해 2월, 베베르는 공사관 보호 명목으로 러시아 해군 병력을 주둔시킨 뒤 고종과 왕세자를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시켰다. 아관파천 이후 친일 내각은 실각하고 친러 내각이 들어섰다. 베베르는 일본 영사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郎)와 협상을 벌여 한반도에서의 러시아 우위를 인정하는 베베르-고무라 각서에 서명했다.

일본의 위협과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감행한 일이라고 해도 일국의 군주가 자국 영토 안의 외국 공관에 몸을 의탁한 것은 자주권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행위였다. 부정적 여론이 들끓었고 열강들의 비난도 거셌다.

고종은 1년 만에 경운궁(뒤에 덕수궁으로 개칭)으로 돌아온 뒤 나라 안팎에 자주 의지를 표명하고 국가 위신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는 취지로 1897년 10월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이 과정에서 베베르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이로 인해 열강의 눈총을 산 것은 물론 본국 관료들한테도 견제를 받아 1897년 러시아로 소환됐다. 이후 행적은 불투명하지만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식 때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특사로 서울을 방문했으며, 러시아의 동아시아 정책에도 관여한 것으로 추측된다. 말년에는 저술 활동에 전념하다가 1910년 1월 8일 독일에서 사망했다.

러시아는 1860년 베이징조약으로 조선과 국경을 마주한 이래 끊임없이 한반도 진출을 노렸다가 1905년 러일전쟁에서 패해 무산됐다. 베베르는 비록 러시아의 꿈을 이뤄주진 못했지만 구한말 우리나라 역사에 구름과 바람을 몰고온 풍운아였고, 조선의 정국과 한반도 정세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서양인이었다.

그의 발자취는 지금도 남아 있다. 덕수궁 서쪽 뒤편이자 예원학교 북쪽의 러시아공사관 터(사적 제253호)는 현재 정동근린공원으로 꾸며져 있으며, 당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망루가 우뚝하게 솟아 있다.

1990년 한국과 소련이 수교한 뒤 주한 소련대사관은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자리 잡았다. 소련 해체 후 이를 승계한 러시아연방은 베베르와 고종이 서명한 계약서와 구입 영수증을 들이밀며 러시아공사관 터 반환을 요구했다. 이미 3,000평은 서울시가 민간에 매각했고 나머지 4,500평도 사적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으니 들어줄 수가 없었다.

한국 정부는 다른 지역을 제안했으나 러시아는 공사관 터 인근을 고집했다. 남는 땅은 서울 강동구 고덕동으로 옮겨간 배재고 운동장(토지개발공사 소유) 2,500평밖에 없었다. 러시아 모스크바의 한국대사관 터 2,500평과 맞바꾸는 조건으로 이를 제공해 2001년 지금의 주한 러시아대사관 건물이 준공됐다.

주한 러시아대사관은 폐쇄형 구조와 철통같은 경비로 일명 ‘정동 크렘린’이라고 불린다. 이 건물 역시 사적 제10호인 한양도성을 깔고 앉아 있다. 성곽길을 따라 걸으려면 러시아대사관을 우회해 멀리 정동제일교회 앞으로 돌아가야 한다. 서울시는 한양도성 복원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는데, 러시아대사관이 큰 걸림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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