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믿음의 씨앗을 뿌린 주문모

중국인 주문모 신부는 선교 목적으로 입국한 최초의 천주교 사제이자 외국인 순교자 제1호다

이희용 승인 2024.05.28 08:00 의견 0
주문모 신부 초상화
그의 순교지에 세워진 서울 용산구 새남터성당에 걸려 있다.

우리나라에 첫발을 디딘 천주교 사제는 임진왜란에 종군한 스페인의 세스페데스 신부다. 그러나 그는 일본군을 상대로 사목 활동을 했다는 기록만 있을 뿐 조선인에게 선교한 정황은 없다.

그가 조선 땅을 떠나고 2세기 가까이 세월이 흐른 1779년, 이벽 등은 경기도 광주 천진암 등지에서 천주교를 믿는 모임을 열었다. 이벽의 권유를 받은 이승훈은 1784년 북경에서 세례를 받은 뒤 주변 인물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서울 명동에서 신앙공동체가 꾸려졌다. 우리나라는 선교사 없이 자발적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자생적으로 목자(牧者) 없는 교회를 만든 유일한 사례다.

그러나 천주교 교리상 하느님의 대리자이자 신과 인간의 중재자인 사제(司祭)만이 세례를 제외한 각종 의식을 집전할 수 있다. 천주교 북경교구는 1790년 교회법에 따라 조선교회에 전례 금지령을 내리며 선교사 파송을 약속했다. 이듬해 윤지충과 권상연이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웠다가 처형되는 신해박해(신해사옥)가 일어나 파송이 보류되자 윤유일은 북경교구를 찾아 거듭 요청했다.

주문모(야고보) 신부는 선교 목적으로 입국한 최초의 천주교 사제이자 외국인 순교자 제1호다. 늦은 나이에 북경교구 신학교에 들어가 제1회 졸업생으로 사제품에 서임됐다. 구베아 주교는 조선인과 용모가 비슷하면 비밀리에 활동하는 데 유리할 것으로 판단해 그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했다. 1794년 12월 윤유일과 지황의 도움으로 압록강을 건넌 뒤 이듬해 1월 서울로 잠입했다.

그는 북촌(계동)에 있는 역관 최인길 집에 은신하며 미사를 집전하고 신자들을 상담했다. 그러나 반년도 되지 않아 한영익의 밀고로 입국 사실과 은신처가 알려져 포졸들이 최인길의 집을 덮쳤다. 최인길은 주 신부인 것처럼 행세하며 대신 붙잡혀 탈출을 도왔다. 최인길·윤유일·지황은 모진 고문을 받다가 숨졌고 시체는 강물에 던져졌다. 이것이 을묘박해다.

주 신부는 도피처를 제공한 여신도 강완숙에게 세례를 주고 그를 최초의 조선천주교회 여회장으로 임명했다. 강완숙은 자신을 모시는 여종 등을 천주교로 인도하는 것은 물론 양반 신분을 이용해 은언군(정조 이복형) 부인과 며느리가 주 신부에게 세례를 받도록 주선했다.

자신감을 얻은 주 신부는 경기도 여주, 충청도 아산·공주·홍성, 전라도 전주 등지로 전도 여행을 다니며 천주교 교리를 전파하고 세례를 주었다. 최초의 평신도단체인 명도회를 조직하고 ‘사순절과 부활절을 위한 안내서’ 등을 집필했다. 주 신부의 열정과 신도들의 헌신 덕분에 4000명이던 천주교 신자는 6년 만에 1만 명으로 늘어났다.

천주교를 믿는 사람이 늘어나는 만큼 천주교를 공격하는 상소도 쏟아졌으나 정조는 천주교에 비교적 온건한 입장을 취했다. 1800년 11세의 순조가 즉위해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자 상황은 돌변했다. 정순왕후와 손잡고 권력을 쥔 노론 세력이 정적인 남인들을 숙청하는 수단으로 신유사옥의 칼을 뽑아든 것이다.

조정은 천주교 신자를 엄금한다는 교서를 발표한 뒤 주 신부 수배령을 내리고 천주교 신자 색출에 나섰다. 이승훈·이가환·정약종·홍낙민 등이 참수되고 정약전·정약용 형제 등이 유배됐다.

주 신부는 청나라로 피신하려고 황해도 황주로 갔다가 자신을 돕던 신자들의 희생이 늘어나는 것을 보다 못해 서울로 돌아와 의금부에 자수했다. 조정에서는 청나라와의 외교관계가 악화할 것을 우려해 추방하자는 의견도 나왔으나 49세의 나이로 새남터에서 효수형에 처해졌다. 윤유일 집안의 선산인 경기도 이천에 묻혔고 2014년 복자품에 올랐다.

천주교의 전래는 조선 후기를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다. 서양 문명에 눈뜨게 하고 신분 철폐 사상과 천국의 내세관을 전파했으나 성리학을 신봉하는 조정과 양반들은 완강히 거부했다. 오히려 기득권을 지키려고 문을 더욱 닫아걸고 신도들을 불온세력으로 몰아붙였다.

세월이 흘러 천주교는 역사의 재판정에서 승리자로 기록됐다. 사옥(史獄·邪獄)이라는 딱지는 박해(迫害)란 단어로 바뀌었고, 처형된 죄인들은 순교한 성인(聖人)과 복자(福者)로 추앙받고 있다. 주 신부도 소명에 따라 몸 바쳐 이 땅에 믿음의 씨앗을 뿌린 인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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