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에 참전한 포르투갈의 흑인 용병들

명나라 원군에도 포르투갈 용병이 있었다. 정확한 출신지는 아프리카 동남부의 인도양 연안국가 모잠비크였다.

이희용 승인 2024.05.07 10:04 의견 0
명나라 군대 환송 잔치를 담은 천조장사전별도에는
수레를 탄 포르투갈 흑인 용병 ‘해귀’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1592년부터 7년간 벌어진 임진왜란은 국제전이었다. 일본(왜국)은 “중국(명나라)을 치려고 하니 조선은 길을 빌려 달라”고 요구한다. 이른바 ‘정명가도(征明假道)’를 요구한 것이다.

명나라를 종주국으로 섬기던 조선은 당연히 거부했고, 일본은 이를 빌미로 침략전쟁을 감행한다. 조선의 지원 요청을 받은 명나라는 전쟁의 불길이 자국 영토로 번지는 것을 막으려고 대규모 병력을 파견한다.

개전 이듬해 스페인 출신의 천주교 선교사 세스페데스 신부가 왜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초청을 받고 조선 땅을 처음 밟았다. 그는 경남 창원시 진해구의 웅천왜성에 머물며 왜군 병사들을 대상으로 미사를 집전하고 가톨릭 교리를 전파했다.

명나라 원군에도 포르투갈 용병이 있었다. 정확한 출신지는 아프리카 동남부의 인도양 연안국가 모잠비크였다. 포르투갈의 식민지여서 당시 포르투갈의 한자식 표기인 파랑국(波浪國) 사람으로 불렸다. 흑인 노예로 명나라에 팔렸다가 파병부대에 배속됐다.

“일명 해귀(海鬼)라고 한다. 노란 눈동자에 얼굴빛은 검고 사지와 온몸도 모두 검다. 턱수염과 머리카락은 곱슬이어서 검은 양털처럼 짧게 꼬부라졌다. 이마는 벗어졌는데, 한 필이나 되는 누른 비단을 납작복숭아 모양으로 둘둘 감아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바다 밑에 잠수해 적선(賊船)을 공격할 수가 있고, 수일 동안 물속에 있으면서 수중생물을 잡아 먹을 줄 안다.”

조선왕조실록의 선조 31년(1598년) 5월 26일의 기록이다. 눈동자와 피부색을 묘사한 대목을 보면 아프리카계 흑인이 틀림없어 보인다. 머리 위에 터번을 쓰고 있어 무슬림일 가능성이 높다.

명나라 장수 팽신고가 선조에게 해귀 4명을 바치자 선조는 이들을 수군에 하사했다. 뛰어난 잠영 능력으로 적선을 공격했다고 하니 요즘 해군 특수전전단의 수중파괴대(UDT)와 비슷한 임무를 맡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해귀가 등장했다는 소문은 금세 퍼져나가 왜군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그해 9월 5일 전라관찰사 황신은 “해귀의 출전 소식에 놀란 왜적들이 모두 안색이 변해 도망갈 준비를 서둘렀다”고 보고했다.

유성룡의 징비록에도 이들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해귀라는 자가 있다. 남번 출신으로 낯빛이 칠처럼 까맣고 바다 밑에 숨어 다니기도 한다. 그 모양이 귀신 같아 해귀라고 부른다. 키가 큰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몸이 아주 커서 거의 두 길이나 되었으므로 말을 타지 못하고 수레를 타고 다녔다.”

각종 문서의 기록뿐 아니라 이들을 생생히 그린 그림도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급사로 전쟁이 끝나자 접대를 맡은 관리 김대현은 1599년 2월 귀환하는 명나라 군대를 위해 훈련원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명나라 장수 이상은 화가 김수운에게 전별 잔치와 개선 행렬을 담은 천조장사전별도(天朝將士錢別圖)를 그리게 한 뒤 김대현에게 선물했다.

한국국학진흥원이 소장한 그림의 맨 마지막 장면 왼쪽 하단을 보면 수레를 탄 해귀 4명이 보인다. “몸집이 커서 말을 타지 못하고 수레를 타고 다녔다”는 유성룡의 기록과 일치한다.

해귀들은 세스페데스 신부와 달리 스스로 기록을 남기지 않았으므로 이름도 남아 있지 않고 이후 행적도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도 이들의 임진왜란 참전은 조선이 서양 세계와 만난 역사의 한 장면으로 기억될 만하다.

400여 년 전 맺어진 인연을 기리기 위해 주한 포르투갈대사관은 연회를 베푼 김대현의 후손(풍산 김씨)에게 해마다 연하장을 보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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