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묻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김경집 승인 2024.02.08 08:00 의견 0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르네 데카르트(1596-1650)의 이 문장은 중세에 대한 독립선언이고 근대의 문을 연 성명서다. 왜 그럴까? 흔히 우리는 그 문구가 데카르트의 유명한 말이라고만 배우고 넘어간다. 심지어 철학하는 학생들조차 그렇다. 거대한 텍스트로만 작동할 뿐 그 의미와 영향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교육방식의 부끄러운 속살이다. 중세 유럽은 신 중심 사회였고 교회가 지배했다. 모든 지식은 교회의 검열을 받아야 했고, 수도원의 도서관은 지식의 중심지였다.

중세 유럽에서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인 피조물에 불과하였다. 창조자인 완전한 신의 은총을 받아야만 완전하고 확실한 진리를 알 수 있었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 말은 소위, 독립선언이었다. 인간은 어떻게 진리를 알 수 있을까? 적어도 그는 일단 지식의 확실성에 대해 찾아보았다. 가장 먼저 감각에 의한 지식을 살펴보았다. 그것은 믿을 수가 없었다. 감각의 주체인 각 개인에 따라 그리고 그 개인도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는 수학을 의심한다. 그러나 수학에서의 공리와 공준은 혼들림이 없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설령 그렇다 해도 만약 수학체계 전체가 악마의 트릭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상상해보았다. 그렇다면 그것도 확실하지는 않다.

그런데 결코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것을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 주체인 내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깨닫는 데 ‘신의 은총’ 따위는 필요 없었다! 확실성의 근거가 비록 크지는 않지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이 선언이 갖는 의미와 파장은 엄청났다. 작은 구멍 하나가 거대한 방죽을 무너뜨릴 수 있다. 이것이 데카르트 명제가 갖는 의미이다. 그 이후 비로소 ‘자유로운 개인’으로서의 ‘나’의 존재가 가능해졌고, 근대정신의 바탕이 마련되었다. 따라서 데카르트의 이러한 ‘물음’이 중세를 무너뜨리고 근대를 열였다고 볼수 있다.

그게 질문의 힘이다. 우리는 늘 주어진 텍스트를 따라가는 데에만 익숙하다. 그것이 우리 교육의 기본 방식이었다. 물론 텍스트를 무시할 수는 없다. 그것은 모든 지식의 기초이고 바탕이기 때문에. 텍스트가 있어야 한다, 없으면 지식이 형성되기 힘들다. 그러나 거기에만 머무르게 되면, 창의적 생각과 주체적 삶은 없다. 텍스트는 기존의 질서와 체제를 의미하며 우리에게 순응을 요구해왔다. 즉, 텍스트는 내가 만든게 아니다. 따라서 거기에는 내가 없다.

그럼 어떻게 내가 정립될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질문이다. 질문은 누가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다. 바로 나 자신이 하는 것이다. 자유로운 개인이 마음껏 질문하고 궁금증을 캐어낼 수 있도록 자유를 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이야기다. 무언가 답을 찾아내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답을 찾아낼 수 있도록 내버려두라는 것이다. 관용이 필요하고 인내가 필요하다. 본질은 외면한 채 사소한 성공 사례만 찾아본다고 해서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질문을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자유’가 절대로 필요하다. 창조는 자유에서 비롯된다. 질문하지 않는 나는 ‘주체적인 나’가 아니라 타율적인 ‘개체로서의 나’일 뿐이다.

질문은 힘이 세다. 왜 그런가? 답은 하나지만 질문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답을 스스로 찾아내려는 주도권을 나에게 주기 때문이다. 질문이 있으면 토론과 협의가 따라오고 이 과정에 귀 기울이면 해법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질문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시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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