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항석_판데믹 히스토리

장항석 승인 2024.01.04 15:51 | 최종 수정 2024.01.15 18:40 의견 0



우리가 두려워하는 바이러스 질환은 내 책에서도 쓴 바와 같이 인류의 영원한 숙적이자 또한 난적이다. 아마도,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은 이길 수 없을 가능성이 높다.

참 아이러니 한 것이 지구 탄생 이후 지금까지 가장 높은 지능과 능력으로 문명을 이룩한 인류가 이런 생물과 무생물의 중간 정도밖에 되지 않는 원시적인 존재에게 맥을 쓰지 못하는 시간이 거의 영원에 이를 것이라는 사실이다.

​과학의 진보 속도는 정말 눈이 부실 지경이어서, 언젠가는 우리가 바이러스쯤이야 간단하게 해결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순진한’ 기대를 하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과학이 발전하는 속도와 바이러스가 변형되는 속도를 비교한다면 바로 답이 나온다. (달팽이 걸음과 빛의 속도 차이 정도라고 하면 너무 과장일까?)

우리가 아무리 약이나 백신을 개발하는데 박차를 가해도 바이러스는 이미 저 멀리 달아나 있다.

그럼 바이러스의 변이 속도를 한번 알아볼까?

바이러스의 DNA code(아미노산이 만들어지는 최소 유전자 단위, 3개의 염기서열로 이루어진다.)는 1만개 정도이고 바이러스의 한세대(generation)는 겨우 하루에 불과하다. 이에 비해 인간의 DNA code는 30억개이고 한세대는 30년 정도로 본다.

이런 사전 가정 하에 DNA 염기서열의 차이가 1% 정도 발생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나 걸릴까? (왜 하필이면 1%를 예를 들었냐 하면, 인간과 침팬지의 염기서열 차이가 1%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럼 이런 가정하에 복잡한 계산을 돌려 보면…… @x#+%10X#$y%#*^…..

인간과 침팬지의 차이가 발생하는 데 대략 700만년이 걸렸지만, 바이러스의 1% 유전자 염기서열의 변이가 발생하는 데는 겨우 며칠이면 충분하다.

700만년 대 3-4일 정도의 무시무시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같은 종의 바이러스 내에도 변이 차이는 많게는 50%까지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의 차이가 인간과 침팬지의 차이인데, 50% 유전자의 차이는 과연 같은 종이라 할 수 있을까?

이런 이유로, 과학의 발전 속도는 차치하고라도 우리 인류는 영원히 바이러스를 잡을 수 없을 것이다. 아주 먼 미래에도 말이다.

여기까지가 이과생의 사고방식으로 풀어낸 내용이다.

그럼 문과생의 해석은 어떤 방식일까?

얼마전 나는 4선 국회의원인 신모 선생의 출판기념회에 초청을 받아 다녀왔었다.

(혹시하여 밝혀 둔다. 신모 = 辛某 ≠ 神母)

그분은 술자리에서 우연히 만났지만, 진영에 상관없이 아주 존경할 만한 분이어서 몇번 만난 인연으로 초대된 것인데, 그는 내 책 <판데믹 히스토리>를 읽은 소감을 그 책에서 이렇게 밝혔었다.

​“…. 생명체가 존재하는 한 바이러스는 박멸은 불가능한 것은 아닌가. 하나의 바이러스를 극복했다고 하면 조금 변형된 바이러스가 생겨나는 바이러스의 생명작용을 멈출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생명의 법칙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모든 생명체가 없어지면 바이러스도 무생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므로 인간과 바이러스가 공존하며 서로 죽이지 않고 공존하는 환경과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의학적인 치료이며 인간의 숙명이 아닐까. 바이러스가 인간의 생명을 앗아가지 않도록 순치 되거나 인간이 내성을 갖도록 진화하거나….”

그렇다.

문과생의 관점은 역시 우리 무미건조한 이과생들 보다 묘미가 있다.

우리와 확연히 다른 이런 사고방식은, 생존의 문제를 어떻게 받아 들이느냐의 차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내가 인상깊게 본 영화 <쥐라기 공원>의 마지막 쯤에 나오던 대사를 나는 참 좋아한다.

“생명은 늘 길을 찾는다.”

내가 암을 연구하면서도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가 공격방법을 찾고 암이 진행되는 길목을 막으면 얼마되지 않아 암은 우회의 다른 길을 통해 다시 일어난다.

억압하고 억압해도 궤멸되지 않는 것이 바로 생명의 원리인 것이다.

오늘의 이 소회는 우리 사회가 가고 있는 극단적인 행태에 대한 우려에서 시작한 것이다.

매일매일 뉴스는 거의 공해에 가깝고, 하나의 현실을 보는 시각이 이렇게까지나 다를 수 있을까, 정말 궁금해지는 시간을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런 차이는 위에 예를 든 문, 이과의 차이와는 다른 것이다. 정말….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리고 서로 악다구니를 쓰며 너죽고 나살자로 나서고 있다.

내가 그런 사회에 속해본 적이 없어 그들의 행태를 다 이해할 수는 결코 없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안다.

뭐 그들도 다 이유가 있을테고, 그러니 자기들끼리는 서로 이해하는 집단이 형성되는 것이겠지.

나도 한때 뜨거운 우리의 진심이, 그리고 투쟁이 우리를 새롭게 할 것이라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오해의 소지가 있어 분명히 하자면, 나는 운동권은 아니다. 이 투쟁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 있어야 할 원천적인 어떤 것을 의미한다.)

한참 그런 시절을 보내고 있었을 시절에 내 생각을 일깨워준 스승이 한분 계셨다.

나는 당시 내가 근무하던 병원에서 불합리한 오너의 횡포를 저지하는 방법으로, 그리고 올바른 의견을 제시하고 잘못된 관행을 교정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교수평의회라고 굳게 믿었고, 이를 설립하는데 열과 성을 다 쏟고 있었다.

그 당시는 누구의 말도 들리지 않았고, 소위 '사회의 물이 덜 든' 젊은 교수의 불타는 사명감만이 나를 이끌고 있었드랬다.

그런 내게 그 대학의 외과 주임교수였던 이** 교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었다.

“닥터 장, 51대 49로 이겨도 이기는 거라네. 지금 자네는 너무 100대 빵으로 이기려 들고 있어.”

​나는…. 이 말을 듣자 마자 뒤통수를 아주 세게 쾅 하고 맞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 그랬다. 어떻게 이길 것인가만 생각하느라 상대방이 보이지 않았고, 옳은 길이란 생각만 하느라 반대편을 그저 악마시 하고 있었다.

그래, 그런 게 아니었다.

그날 깨달았던, 그러나 한참의 시간이 흐르도록 제대로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던 그 개념, 바이러스가 인간을 다 죽이고 나면 스스로 살수 없다는 말, 바로 그것이다.

결국 어떤 상황이더라도, 또 어떻게 하더라도 압승을 하기 어렵다는 것을 이제는 너무나 잘 알기에, 그리고 승부란 것이 한번만은 아니기에…

그리고 지금 어떤 승부를 내더라도 결국 ‘생명은 길을 찾을 것’이기 때문에.

적어도 살아 있다면 말이다.


[출처] 바이러스와 오늘 (거북이 가족 - 갑상선암 카페) | 작성자 surgh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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